버스 정류장에 서서 휴대폰 액정에 적힌 숫자를 확인한다. 13:05. 한숨이 나온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도서관에 가야 한다는 생각부터 했다. 급히 읽어야 할 책이 있었다. 그러나 하루를 시작하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챙겼던 일을 여섯 시간이나 지나서 실행에 옮긴 것이다. 명치께가 쓰라리다. 뜨거운 건지 싸늘한 건지 종잡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꿈틀거린다. 마음을 다스리며 안내판을 바라본다. 도서관 앞으로 가는 버스의 도착시간 알림이 뜬다. 12분 뒤에 도착한단다. 12분! 애써 눌러 놓았던 꿈틀거림이 울컥 치솟는다.
오전 내내 나는 뭘 했던 걸까.
도서관 문 여는 시각에 맞춰서 나가기 전 주섬주섬 집안일을 해치웠다. 아침 내내 흩뿌리던 비가 현관문을 나서려는 순간 장대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잦아들 때까지 번역 작업을 할 요량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컴퓨터를 켜자마자 뭐에 씌운 듯 SNS에 접속했다. 이런저런 말참견을 했고, 화제가 된 기사 링크를 따라가 읽었고, 그러다가 시폰 블라우스 광고에 사로잡혀 쇼핑몰로 빨려 들어갔다. 옷 사진들을 넋 놓고 구경하다 보니 몇 시간이 휘리릭 지나 버렸다.
이 게으르고 산만한 인간! 버스를 기다리며 나를 질책한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다. 의지도 박약하고. 번역 마감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생각에 이르자, 열패감의 수위가 아슬아슬 높아진다. 건드리지 않으려 굳게 막아놓은 둑을 넘어선다. 올해는 장편을 시작이라도 해보려 했는데…. 다짐만 벌써 몇 년째인가. 내 그럴 줄 알았다. 나를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의 끝자락이 닿는 곳은 슬픔이다.
도서관 1층 로비를 지나가는데 탁자 위에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온다. 뾰로통한 소녀의 얼굴이 그려진 표지. 띠지에 적힌 홍보 문구를 읽는다. ‘사랑하세요, 나를. 지금, 이 순간을.’ 저자처럼 정신과 의사라면 자신을 사랑하기 쉬울 것 같다. 매순간이 축복으로 느껴지겠지. 저렇게 두꺼운 책을 써낼 정도면 무척 성실할 테고, 사람을 돕는 직업이니 존경도 받을 테니까. 어떻게 자신을 안 사랑할 수 있겠어! 억지를 부리며 투덜거리다가 깨닫는다. 자신을 사랑하라고, 호소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이유는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드문 탓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노력한다고 해서,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사람은 자신을 아끼고 보호하려 하지만, 그건 본능적 생존 욕구에 가깝다. 자기애는 좀 다르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누군가에게라도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자신의 미학적 혹은 윤리적 기준에도 도달해야 한다. 게으르고 산만한 자신이 속상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한 것은, 게으르고 산만해서 성취한 게 없고 아름답지도 못하고 그래서 사랑받지 못하는 거라고 좌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누가 내 머릿속에 그런 평가의 기준을 심어 놓았나.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골똘해진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나는 좌절하고 괴로워하나.
필요한 책을 빌려서 창문가에 놓인 안락의자로 간다. 동시에 저쪽에서 다가오던 청년이 머뭇거리다가 나에게 의자를 양보한다.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는다. 타인에게 사랑받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을 때 사람은 어떤 지경까지 추락할 것인가. 눈을 들어보니, 3층까지 가지를 뻗은 키 큰 나무 덕분에 유리창은 온통 푸른빛 물방울로 가득하다. 마침내 나는 도서관에 왔고, 책을 빌렸다. 다가오는 번역 마감이나 쓰고 싶은 소설은 잠시 잊기로 한다. 나를 사랑하고 싶어서. 자책이 길지 않은 것은 산만함의 미덕이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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