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강제징용 배ㆍ보상 문제도 다 해결되지 않았나. 청구권 자금을 받아간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을 외면한 것이 문제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문제가 한일 경제전쟁으로 비화한 직후 친하게 지내는 서울주재 일본 특파원에게 들은 말이다. 강제징용의 역사를 바라보는 양국의 극명한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러면서 일본 기업과 한국 기업의 자발적 출연금으로 피해자들에게 보상하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아베 정부가 수용할 리 만무하다고 덧붙였다. 끝내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한국 정부가 나서야 풀린다는 해법을 제시하려는 듯했다.
일본의 주장과 달리 강제징용 문제는 우선 일본의 이중적 입장이 문제다. 애초 피해자들이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을 때 일본 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에게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난해 고노 다로 외상이나 미카미 마사히로 외무성 국제법 국장은 “강제징용 개인청구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고 실토를 했다. 오락가락한 해석 속에 아베 정부는 ‘개인 청구권은 살아 있지만 재판을 통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식의 궤변으로 교통정리를 했다고 한다. 청구권 협정을 들어 개인 배상을 거부했던 일본 사법부가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화해조정을 몇 차례 성사시켰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일본의 논리는 내부에서조차 스텝이 꼬이는 셈이다.
사실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구제는 일본 정부만 탓할 일도 아니다. 우리 정부의 대응도 문제가 없지 않다. 2003년 정부가 파악한 강제징용 피해자는 23만명에 이르지만 일본에서 받은 청구권 자금으로 보상받은 피해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1974년 청구권보상법에 따라 8,000여건에 대한 보상이 이뤄진 뒤 2007년 ‘희생자지원법’으로 추가보상이 추진됐으나 증거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문재인 정부라고 다르지 않다. 강제징용 문제가 본격적으로 발화한 지난해 대법원 판결 전후로 한일관계 악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안팎에서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집권 이후 대일 관계에서 무대응ㆍ무협상 원칙으로 일관하던 정부는 대법원 판결 7개월 만에 한일 양국 기업이 공동 출연하는 ‘1+1 방식’을 내놓았다가 일본의 반발만 불렀다. 우리 정부의 책임은 무시했다. “청구권협정을 통해 일본에서 받은 3억불은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돼 있다고 봐야 한다” “정부는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해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의 결론 취지를 문재인 정부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도리어 문재인 대통령의 법무참모였던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논점을 흐리면서 내부 분열만 부추겼다. 죽창가로 여론을 선동하고 친일파 프레임으로 편가르기를 했다. 대일 역사ㆍ경제전쟁에 나서는 정부의 뒤통수를 치고 발목을 잡는 일부 보수세력의 얄팍한 정치셈법에 화가 날 수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엄정한 대외정세를 감안한다면 전략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조 전 수석의 논리라면 독도 상공을 침범한 러시아와 관계가 악화했을 때 친러파를 갈라내고, 사드와 유사한 이슈로 중국과 충돌했을 때 친중파를 배제해야 한다. 대법원 판결 당시 개인 청구권 소멸을 이유로 소수의견을 냈던 두 명의 대법관도 친일파로 갈라 칠 수밖에 없다. 이번 국면을 대일 항쟁으로 생각한다면 힘을 합쳐 싸워도 모자랄 판인데, 저렇게 편가르기만 하면 어떻게 이길 것인가.
편가르기는 정치의 언어지 대외정책의 문법은 아니다. 외교에서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실리와 국익이 있을 뿐이다. 대일 협상론을 친일파로 분류하는 조 전 수석의 접근은 그래서 대외정책이 아닌 국내 정치용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내년 총선을 겨냥한 포석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저런 식으로는 국제통상 질서까지 무시한 아베의 단일대오를 이길 수 없다.
김정곤 사회부장 jk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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