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얘기지만 이순신 장군을 다룬 첫 전기를 낸 사람은 구한말의 일본인이다. 1892년 측량기사로 조선에 온 세키 고세이가 ‘징비록’ 등을 토대로 임진왜란 격전지를 현지 조사해 ‘조선 이순신전’이라는 소책자를 냈다. 일제강점기 때 진해에 근무하던 일본 해군 장교가 이순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 충렬사를 동료들과 함께 참배했다는 증언도 있고,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대학에서 이순신을 연구하고 강의한 자료도 남아 있다. 세계 열강에 맞선 일본 해군력 강화 필요성이 바탕에 깔려 있긴 하나 일본인의 이순신에 대한 경모와 두려움의 정도를 보여 주는 단면이다.
▦ 한국에서 이순신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소년 시절 군인을 무척 동경했는데, 보통학교 5학년 때 춘원이 쓴 ‘이순신’을 읽고 숭배하게 됐다”는 그의 친필 기록에서 나타나듯 이때부터 이순신은 박정희에게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대통령 재임 시절 추진한 이순신 성웅화 작업은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았다. 군사독재 정권 유지와 친일 이미지 불식을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지금도 이어진다.
▦시인 김지하가 희곡 ‘구리 이순신’에서 풍자한 것처럼 권력자를 지키도록 구리 속에 가둬 놓은 이순신을 국민 모두의 품으로 인도한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2004년 탄핵안 가결로 권한이 정지된 노 전 대통령이 김훈의 역사소설 ‘칼의 노래’를 읽은 뒤 TV 프로그램에 추천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정적들의 모함으로 삭탈관직당해 옥에 갇혔던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무렵부터 시작하는 소설 내용이 노 전 대통령의 당시 처지와 오버랩되면서 이슈가 됐다.
▦ 일본의 경제보복 사태로 한일 갈등이 고조된 국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소환한 것을 보고 노 전 대통령의 그때 모습이 떠올랐다. 사면초가의 상황에 맞닥뜨린 심경과 특히 일본의 ‘침략’에 대한 단호한 대응 의지를 보이는데 이순신의 ‘거북선 12척’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본인에게 두려우면서 존경스러운 대상인 이순신 장군을 거론해 그들의 의도가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다만, 염두에 둘 것은 일본이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 대목은 “탁월한 전술과 용의주도한 계략”이란 점이다. 치밀한 전략과 두뇌가 우선돼야 일본과의 장기전에 이길 수 있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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