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운서 전 산업자원부 차관이 24일 필리핀 마닐라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0세. 공직을 마치고 공기업, 민간기업에서 화려하게 최고경영자(CEO)로 역량을 발휘했던 그는 돌연 필리핀의 원주민 촌에 들어가 봉사활동을 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타이거 박’이란 그의 별명은 상공부(산업자원부의 전신) 통상진흥국장 시절부터 생겨났다. 당시 그의 상대방이었던 일본 통상산업성 무역국장이 무역협상 과정에서 만난 박 전 차관에 대해 “호랑이 같은 강적이다”며 직접 붙여줬다. 타이거 박은 일본어는 한마디도 못했고, 영어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경상도식 투박한 발음으로 P와 F 발음의 구별이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논리와 끈질김으로 상대방을 제압했다. 풍부한 사례수집과 국제 통상규범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하면서 상대방을 굴복시켰다.
한번은 일본의 비관세 장벽 완화에 필요한 협상자료 수집을 위해 필자를 거의 한 달간 일본에 파견시켜 세관과 협회, 제조공장, 연구소 등을 다니면서 샅샅이 조사시켜 통관, 제품 허가, 안전, 표준, 기술에 관련된 수십 개의 규제사례를 찾아낸 적도 있다. 그리고 무역협상에서 그 규제사례집을 들이대어 오히려 그들을 감탄시키고 백기를 들게 만들었다. 그런 그의 명성은 미국에도 전해져서 미 통상 대표부의 협상꾼들은 그를 ‘Tiger’라고 퍼스트네임처럼 불렀다. 철저하게 논리적이고 상대에 약속한 사항은 우리 내부에 어떠한 반대가 있어도 꼭 지켜주어 신뢰를 얻어냈다. 컬러TV 반덤핑 협상에서 그랬고 철강, 섬유 물량규제, 반도체 특허권 분쟁 등 수많은 통상협상에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미국이나 일본의 협상파트너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긴장을 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배우려 했고 그와 친하려 했다. 우리의 대외교역환경이 시시각각 어려워지고 일본과 일전을 치러야 할 지금 시점에 ‘타이거 박’이 있었으면 과연 어떤 전략을 썼을까.

그를 친재벌론자라고 보는 이도 있고 반재벌론자라고도 보는 측도 있다. 그는 삼성의 자동차 사업참여를 이끌어내게 하여 ‘친재벌’이라고 누명도 쓰기도 했지만, 대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이나 토지공개념, 업종 전문화 등을 추진하여 ‘반재벌주의자‘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친재벌도 반재벌도 아니었으며, 엄밀히 말하면 친기업주의자였다. 기업이 국제 경쟁력을 갖춰야 우리 산업이 살고 그것이 성장과 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산업자원부 차관을 끝으로 공직을 떠난 뒤엔 공기업인 한국중공업 사장, 민간기업인 데이콤 회장 등을 거치며 경영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던 그가 돌연 필리핀 민도르 섬의 원주민 촌에 다녀온 후 그 지역에서 헐벗고 굶주린 어린이들을 보고 평생 그곳에서 살며 봉사활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약 15년 정도 그곳에서 살면서, 그는 자비로 학교와 교회를 만들고 농장을 직접 경영하면서 그들과 같이 지내며 완전히 원주민 추장처럼 지냈다. 그곳은 반군이 출몰하는 지역이지만, 정부군과 반군 모두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5년 전 현지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하고 한국으로 후송돼 대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지만 결국 불구의 몸이 됐다. 우리 후배들은 그에게 한국에서 강연이나 간증을 하면서 사시라고 했지만, 그는 불구의 몸을 이끌고 자신을 기다리는 원주민 촌으로 돌아갔다가 그 고단한 인생을 끝내고 영면하게 되었다.
그가 그립다. 우리나라에 그런 경제관료가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또 그런 사람에게 배웠다는 게 행운이었다. 특히 요즈음 대외여건이 좋지 않고 기업이 어려울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타이거 박’을 떠올릴 것이다. 편히 쉬시기 바란다.
조환익 전 산업자원부차관ㆍ한전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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