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리가 외교에서 유일하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한국 관계입니다. 고위급 대화로 우선 한일 양국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ㆍ74) 일본 교토산업대 교수는 23일 한국일보와 만나 최근 한일 갈등 현안에 대해 “해결이 쉽지 않겠지만 적극적인 대화로 풀어가는 수밖에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도고 교수는 특히 일본의 대한 수출 규제가 한국인의 식민지 피해 감정에 불을 지를 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의 피해를 부르는 대응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 유럽아시아국장을 거쳐 2001년 네덜란드 대사로 직업 외교관 생활을 마친 도고 교수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도공의 후예로, 2차 대전 종전 당시 외무장관인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외조부다. 퇴직 후 네덜란드 라이덴대, 미국 프린스턴대, 대만 단코대 등에서 가르쳤고 2007년에는 서울대 국제대학원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2010년부터 교토산업대 법학부 교수 겸 세계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일본이 과거 가해의 역사를 반성하는 토대 위에서 미래지향적 동북아 관계를 구축해가자는 취지를 담은 책도 여러 권 발간한 그를 도쿄에서 만났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한일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이달 초 반도체 소재 3개 품목 수출 규제가 발표됐을 때 일본 언론에서조차 부당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한술 더 떠 수출관리 우대국인 ‘화이트국가’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절차까지 밟고 있다.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처음 수출 규제가 알려졌을 때부터 누구나 그 이유를 징용 문제로 알았다. 일본 신문들도 그렇게 썼다. 지난해 말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국제법을 지키지 않는 한국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의사 표시로 이해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본 정부는 한국의 부적절한 수출 관리를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그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는 일본 국민을 향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번 수출 규제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나.
“한일 관계로 한정하면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일본에 대해 일종의 ‘한(恨)’을 품은 한국인이 여전히 적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맞대응은 그런 감정에 불을 지르는 격이라는 것을 일본 쪽에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서울 강연 때 청중의 다수가 징용 문제를 질문하더라. 대법원 판결 이후를 걱정하면서 같이 해법을 고민해보자는데 대체로 동의했다. 그러나 일본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이성적인 해결 방식을 찾자는 그런 한국인들도 일본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또 하나는 일본 정부의 규제로 한국 수출이 어려워지는 일본 회사가 손해를 본다는 점이다. 해당 회사에는 심각한 위기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 배경에 징용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통해 국제법으로 지켜야 할 약속을 한국이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은 식민지 문제가 그 협정으로 온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그 협정이 모든 권리 의무 관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한일 협정은 타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렸다. 그 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것은 당시 한일 정부도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약이란 국가끼리 주장을 양보해 서명에 이른다. 한일도 식민지 문제로 대립했지만 서로 타협해 협정을 맺었다. 당시에는 한일 정부 모두 그것이 서로에 이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012년 한국 대법원 첫 판결 때나, 이번 판결에 무척 놀랐다. 일반적인 일본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지금 진행되는 대로 관련 기업의 압류 재산 처분까지 가면 한일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울 수 있다. 애초 일본인은 한국의 식민지 경험과 그로 인한 상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하지만 한일협정 이후 부침 속에서도 관계를 지속하며 부족하지만 조금은 그런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이번 판결은 그렇게 구축해온 전후 체제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지난 달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아베 총리가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하지 않은 것도 아마 그런 충격 때문일 것이다.”
-한국 정부는 최근 한일 기업이 재단을 만들어 확정 판결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면 외교 협의를 검토해볼 수 있다고 일본에 제안했다.
“외교 협의는 거부하기 힘들겠지만 판결을 전제로 한 피해자 배상 문제라면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러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양국이 심각한 신뢰의 위기를 맞았다. 어떤 형태로든 결국 대화를 통해 우선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문제를 풀어가려면 양국 모두 여러 분야의 다양한 수준에서 대화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한일 상황을 보면 2006년 독도 해양조사 문제로 맞부딪치던 때가 떠오른다. 당시 국제수로기구 해저지명소위원회에서 한일 모두 각각 자국명으로 동해 해저 지명 등재 신청을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일본은 그를 위해 해상보안청 측량선을 보내려 해 정면 대결 상황이었다(노무현 정부에서는 일본 측량선이 올 경우 나포하기 위해 경비정 20척을 대기시켰다). 하지만 양국 정부 모두 “원만한 외교적 해결”을 중시했고 결국 당시 아베 정부는 야치 쇼타로 외무차관을 한국에 보내 대화를 통해 한국의 지명 등재 보류와 일본의 측량선 파견 철회라는 양국 타협을 끌어냈다.”
-물밑 협상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인가.
“보이지 않는 곳이라도 좋으니 지금 이상으로 관계가 나빠지지 않도록 상당한 고위급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다. 중일 관계도 참고할 수 있다. 아베 2차 내각이 출범한 2012년 중일 관계는 거의 최악이었다. 직전 노다 정부는 중국과 영유권 갈등이 있는 센카쿠열도를 국유화해 중국의 반발이 거셌다. 그 해 말 취임한 아베 총리도 중국에 대해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심지어 2013년에는 야스쿠니 참배까지 한다. 당시에는 중국은 물론 미국도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다 중일은 2014년 베이징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회담을 통해 이 문제를 풀 생각을 하고 센카쿠와 야스쿠니 문제를 조율하는 밀담을 진행했다. 이때 가교 역할을 한 것도 야치 쇼타로다. 중일은 갈등 현안을 두고 양국간 주장이 다르다는 점을 밝히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호혜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자는 문서 작성에 이른다.”
-징용 갈등이 근본 문제라면 대화와 타협의 내용도 중요할 것이다.
“일본 대법원은 2007년 4월 중국인 전후보상 재판에서 법적으로는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강제연행으로 원고들이 가혹한 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관계자가 피해 구제를 위해 노력할 것을 기대한다’는 바람을 분명히 했다. 그 취지에 따라 실제로 당시 피고 니시마쓰건설은 피해자들과 화해했다.
한일 징용 문제도 이런 기조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려면 기금 조성 등의 과정이 필요할 수 있다. 다만 그게 바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한국 대법원 판결과 그 이후 움직임으로 이 문제와 관련한 법적 안정성이 흔들리고 있다. 중국은 전후 배상 포기가 지속된 상황(중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의 토대인 1972년 중일 공동성명 제5항에서 ‘중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 청구 포기를 선언한다’고 명시했다)에서 이런 판결이 나왔지만, 한국의 경우 협정을 통한 보상금 지불이 있었고 그를 통해 이익을 본 한국 기업도 있다. 일본 쪽에서는 이중부담을 하라는 것이냐, 인도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일본 젊은이들은 징용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나.
“교토산업대 학생들과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국 대법원 판결을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대부분 비슷하다. 문제 해결 방법을 두고는 의견이 둘로 나뉘더라. 하나는 한일은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므로 비용을 일본 쪽에서 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처지를 이해한다는 학생들이다. 또 하나는 한국 대법원 판결은 무리가 있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지만 대화를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갈등 현안에 대해서는 한국 못지 않게 일본도 강경해 보인다.
“아베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성을 담은 고노 담화에 비판적인 민족주의자지만 전체적으로 외교 분야에서 나름 성과를 거두고 있다. 논란이 없지 않으나 트럼프 정부 출범 직전 안보법제를 개정해 미국의 호감을 샀고 중국과 관계도 호전시켰으며 러시아와도 나쁘지 않다. 현재 아베 외교의 유일한 오점은 한국과의 관계다. 한국 대법원 판결이라는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결국 양국간 대화로 풀어갈 수밖에 없다. 아베도 그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이번 갈등이 한일 협정에 토대를 둔 ‘65년 체제’의 모순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당시 한국은 식민지 피해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국력이 약했다. 그 약함을 보충하기 위해 그런 협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강해졌다. 조건이 바뀌었으니 그 협정으로는 안 된다는 움직임은 있을 수 있다. 국가간 조약이란 영구불변이 아니다. 일본만 봐도 근대화 초기 서구 열강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조약을 러일 전쟁 후 잇따라 개정했다. 다만 일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바꿀 수는 없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가야 할 문제다.”
도쿄=글ㆍ사진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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