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키 계약으로 팀 전체 한 몸 같아… 팀장은 노동자 적용 안 돼 팀원까지 ‘불똥’
“억울하게 계약 해지됐습니다.”
지난 5월 종방한 SBS 드라마 ‘빅이슈’의 스태프 A씨는 3월 황당한 소식을 접했다. 제작B팀에서 일하던 외주 기술팀 팀장(감독) 스태프의 계약이 갑작스레 해지됐다는 것이다. 팀장 스태프는 ‘턴키 계약(일괄수주계약)’을 맺었기에, 팀원까지 10여명이 제작 현장에서 배제됐다.
25일 한국일보 취재 결과, 당시 ‘빅이슈’ 팀장 스태프 계약 해지에 SBS가 관여했다. 서류상 계약 당사자는 제작사 HB엔터테인먼트였으나, 생살여탈권은 방송사가 쥐고 있었던 셈이다. A씨는 “당시 SBS 총괄PD가 팀장 스태프들을 식사자리에 불러 ‘(소문)들었을 것’이라고 계약해지를 통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며칠 뒤 정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업무에서 배제됐다”고 말했다.
드라마 팀장 스태프가 노동 사각지대에 놓였다. 현장에서는 방송사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노동자지만, 턴키 계약 당사자라는 이유로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법 적용 대상도 아니다. 드라마 현장에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반발이 크다.
팀장 스태프는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촬영 전 제작사와 계약서를 작성하지만,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다. 제작사가 자의적으로 조항을 해석하는 경우가 많고, 결국 방송사 입김에 따라 계약 내용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이다. 실제 ‘빅이슈’ 스태프들은 당시 큰 사건사고가 없었는데도 팀장 스태프의 계약이 일방적으로 해지됐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 SBS 총괄PD는 “비용 등 이유로 외주 카메라팀을 내부 인력으로 교체하면서 (촬영과 관련된) 다른 팀장 스태프에게 계약지속 여부를 물었다”며 “(해지는) 합의하에 이뤄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한 지상파 드라마 PD는 “카메라팀이 바뀐다고 (관련된) 다른 기술팀을 별도로 불러 계약 해지 여부를 묻는 일은 흔치 않다”고 밝혔다.
팀원 스태프도 고용이 위태롭긴 마찬가지다. 턴키 계약은 팀장 스태프가 제작사로부터 용역비를 통째로 받고 이를 팀원 3~5명이 나눠가지는 방식이다. 방송사 및 제작사와 개별계약을 맺는 소수 스태프를 제외하면 대부분 이 같은 계약구조를 통해 일을 하게 된다. 팀장 스태프의 계약 해지는 곧 팀 전체 해고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이렇다 보니 스태프는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방송사와 제작사에 항의할 수 없는 실정이다. 추혜선 정의당 의원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 스태프 노동단체는 지난달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스태프가 안전 사고를 당해도 턴키 계약을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방송사도 제작사도 책임지지 않는 게 현재 드라마 제작 현장”이라고 주장했다.
드라마 현장에서 턴키 계약은 빈번하다. 방송사 및 제작사와 개별 계약하지 않는 스태프가 많을 수 밖에 없다.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이 지난 1월 발표한 보고서 ‘2018 방송제작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드라마 기술팀 스태프 105명 중 61명(58.1%)이 턴키 계약으로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었다고 밝혔다. 서면 계약 경험이 없는 스태프도 47명(44.8%)에 달했다. 콘진원은 실태조사를 통해 “조명 스태프는 지난해 중반까지도 턴키 계약 아래 팀장만 제작사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개인 스태프는 별도 계약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며 “올해부턴 서면 계약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지만, 실제 그런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노동법은 턴키 계약에 놓인 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정부가 팀장 스태프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7일 ‘닥터 프리즈너’ 등 KBS 드라마 현장 네 곳에 대한 근로감독 결과를 발표하며 "(팀장 스태프는) 본인 책임 하에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어 근로계약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팀장 스태프를 노동자가 아닌 제작사와 계약을 맺은 사업자로 본 것이다. 하지만 스태프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는 지난 18일 논평을 통해 “드라마 제작 현장의 진짜 사용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라고 노동부를 비판했다.
드라마 현장에선 턴키 계약 근절 목소리가 크다. 방송사가 팀장 스태프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계약이라는 것이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김수영 변호사는 “밤샘촬영이 많은 드라마 현장 특성 상 초과수당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턴키 계약은 결국 이 책임을 사실상 노동자인 팀장 스태프에게 떠넘기는 것”이라며 “드라마는 여러 부문이 모여 완성하는 상품이기에 독자적 사업을 하는 도급 관계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진단했다. 김 변호사는 “팀장 스태프의 지위에 대해 정책적 법리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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