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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판, 새우, 슬리퍼 조각… 친숙한 오브제 뒤에 숨겨진 오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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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판, 새우, 슬리퍼 조각… 친숙한 오브제 뒤에 숨겨진 오싹함

입력
2019.07.29 14:01
수정
2019.07.29 18:1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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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라리오갤러리 ‘척추를 더듬는 떨림’전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카시아 푸다코브스키가 자신의 설치작품 '복수'를 설명하고 있다. 신지후 기자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카시아 푸다코브스키가 자신의 설치작품 '복수'를 설명하고 있다. 신지후 기자

유럽에 전해지는 이야기다. 욕실에 생새우를 가득 채워 넣고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절치부심에 관한. 외도 등으로 끊임없이 속을 썩여온 남편은 역시나 며칠 뒤에야 집을 찾았다. 평소대로 욕실부터 찾는 남편, 썩어가는 새우 냄새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친다. 죽도록 밉지만 사랑을 멈추지 못하는 아내의 ‘소심한 복수’는 그렇게 성공한다.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 카시아 푸다코브스키는 옅은 분홍빛을 띠는 새우를 욕실 커튼 안에 채워 꿰맨 설치작품으로 이 이야기를 형상화했다. 국내 전시를 위해 얼마 전 방한한 푸다코브스키는 “굉장히 달콤해 보이는 이 작품 뒤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며 설치작품 ‘복수’를 소개했다. 아픈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 나아가 자유를 갈망하는데도 통제와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비극을 이 작품에 담았다.

카시아 푸다코브스키의 '복수'.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카시아 푸다코브스키의 '복수'.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친숙한 오브제 뒤에 숨은 이면을 다루고 있는 작가 4명의 그룹전이 서울 삼청동 아리리오갤러리에서 열린다. 푸다코브스키를 비롯해 솔 칼레로, 페트릿 할릴라이, 조라 만이 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첫 전시다. 전시명은 ‘척추를 더듬는 떨림’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 일상을 잠식해 온 존재를 문득 깨달았을 때의 오싹한 경험을 빗댔다.

아프리카에서 유년기를 보낸 만은 케냐 해변의 숨겨진 비극을 작품화 했다. 해변에 차곡차곡 쌓이며 생태를 위협하는 플라스틱 슬리퍼들에 착안한 것이다. 만은 세계 곳곳의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이 슬리퍼들을 모아 일일이 해체한 뒤 엮어 만든 ‘코스모파기’를 미술관에 걸었다. 일종의 커튼 같은 이 작품을 구성하는 슬리퍼 조각들은 환경파괴로 피폐해진 인간의 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만은 “일차적 관찰만으론 알 수 없는 사안의 이면을 들여다 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솔 칼레로의 '아마조나스'.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솔 칼레로의 '아마조나스'.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언뜻 보기엔 독특한 빛깔의 칠판 그림으로 보이는 칼레로의 ‘아마조나스’ 역시 숨겨진 메시지가 날카롭다. 17살 때 고향 베네수엘라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그는 고국의 문화와 역사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는 데 문제 의식을 키웠다. “라틴 아메리카인들은 친절하고 항상 열정적이며 화려한 색감을 좋아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있죠.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한 문화가 특정 시각으로만 해석되는 현상에 비판적으로 접근해보려 했어요. 주황, 빨강, 파인애플, 망고 같은, 라틴 아메리카를 떠올릴 때 자주 언급되는 이미지를 되레 강조하는 방법을 통해서요.”

코소보 출신의 할릴라이는 큰 책상에 철근을 꼬아 만든 ‘철자법 책’ 연작을 선보인다. 모국의 학교 책상에 그려진 낙서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비극적 전쟁을 겪어 온 코소보의 역사를 왜곡하려는 세력에 대한 저항이자 아픈 역사를 잊어가는 개인의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겼다.

작가들의 출신지와 작품 형태가 모두 다른 만큼 세계를 향한 각양각색의 접근법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10월 5일까지다.

조라 만의 '코스모파기'.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조라 만의 '코스모파기'.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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