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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역사인식 진전, 식민지배 불법 인정과 배상 이끌어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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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역사인식 진전, 식민지배 불법 인정과 배상 이끌어낼 수 있어”

입력
2019.07.26 04:40
수정
2019.07.26 09:37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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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랑 끝 한일 비상구는 없나] <하> 역사ㆍ일본 전문가 대담

 ‘공격 받을 때만 방위력을 행사’ 아베의 원칙 역이용할 필요성 

 “섣불리 ‘65년 체제’ 뛰어넘으면 한일 관계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역사학자인 정재정(왼쪽)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와 일본 전문가인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가 2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한일 갈등의 배경과 해법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역사학자인 정재정(왼쪽)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와 일본 전문가인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가 2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한일 갈등의 배경과 해법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두 나라 관계가 최악이라는 평가도 없지 않다. 발단은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자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이다. 수교 당시 정부간 협정으로 이 문제가 해소됐다고 여겨온 일본은 펄펄 뛰었다. 자국 기업이 피해를 보게 된 상황을 좌시할 수 없다며, 한국 정부에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법부 판결을 갖고 왈가왈부할 수 없는 데다 국민 상처를 도외시하기 곤란한 한국 정부에게 이는 난제였다. 일본은 반년 넘도록 진전이 없자 강수를 뒀다. 7월 시작과 함께 기습적으로 대(對)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확전을 각오한 명백한 보복이었다. 일본이 급기야 안보 우호국(화이트리스트) 명단에서 제외하겠다고 하자, 한국 정부도 맞불을 놨다. 안보상 신뢰 없이 어떻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느냐며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파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전후 냉전기인 1960~90년대 양국은 좋은 이웃이었다. 안보ㆍ경제 분야에서 서로가 필요했다. 하지만 완전히 화해한 건 아니었다. 일본의 배상도 진정한 사과도 없었지만, 당장 협력해야 살아남는 현실이 잠시 과거를 덮어뒀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양국 갈등이 한일관계 정상화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파국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한편이 굴복하는 건 바람직한 해결이 아니다.

그렇다면 두 나라가 상생하는 묘수는 없을까.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제2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지낸 관록의 역사학자이고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일본 정치ㆍ외교에 해박한 국제정치 전문가다. 2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2시간 가까이 두 교수를 만나 해법을 들어봤다. 일본의 역사인식도 1965년보다 상당히 진전된 만큼 과거 식민지배 불법성 인정과 배상을 이끌어내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게 이구동성이었다.

양정대 논설위원(이하 사회)=21일 일본의 참의원 선거가 끝났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이끄는 연립 여당이 개헌 발의선은 넘기지 못했지만, 과반 의석은 차지했다. 이런 결과가 한일 갈등 국면에서 어떤 변수가 될까.

정재정 교수(이하 정재정)=그간 추진해 온 정책을 아베 총리가 그대로 밀고 갈 가능성이 크다. 특히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는 더 강화할 것 같다.

남기정 교수(이하 남기정)=아베 총리가 던졌던 화두가 ‘안정이냐, 혼란이냐’였다. 일본 국민들이 안정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헌법 개정이라는 부분에선 제동을 걸었다. 균형이 잡힌 셈이다. 더불어 정국 운영을 신중하게 해달라는 요청도 한 거라고 볼 수 있다. 강경 기조를 유지하겠지만, 과격하게 갈등을 에스컬레이션(상승)시키지는 않을 듯하다.

사회=한일 갈등 해소를 더 기대하기 어려워진 것 아닌가.

남기정=아베 총리가 지금껏 천명해 온 역사인식을 역이용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비핵ㆍ평화와 함께 전수방위(공격 받을 때만 방위력을 행사함) 원칙을 꾸준히 표명해 왔다. 그걸 거스를 셈이냐고 아베 총리에게 묻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수단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야지, 아베 총리를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정재정=최근 한일관계가 악화일로인 건 양국 정상 간의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양국 정상이 날을 세우니, 관료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한들 효과가 있겠나. 정상간 신뢰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사회=도화선이 된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을 관리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막을 방법이 있었나.

남기정=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식민지배는 불법이라는 전제다. 한일 청구권협정이 지탱하고 있는 1965년 체제를 상당 부분 수정할 수밖에 없다. 대법원 판결에 존중을 표했으면 정부가 한일관계 전반을 다시 다룰 각오를 하고 일본에 이 문제를 설명했어야 한다. 양국이 근본적인 부분에서 함께 고민을 해보자는 식의 대응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대응은 보이지 않고, 일본 입장에선 계속 문제제기를 하는데도 한국이 답하지 않으니 무시 당했다고 여기고 감정적 대응을 한 것 같다. 소극적 태도일 수밖에 없었던 정부 사정도 이해할 여지는 있다. 지난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급진전하며 대일 외교 역량이 제한됐고 프로세스 전개를 위해 일본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역사 문제에 특히 민감한 아베 정부에 정면 도전했다가는 자칫 한일관계가 심각한 어려움에 빠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을 법하다. 그런 판단에 따라 ‘무대응’ 방식의 로키(low keyㆍ저자세) 행보를 보인 게 아닐까 싶다.

정재정=1965년 체제와 판결이 어떤 관계인지, 한국 정부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밝히지 않으니 일본이 불안감을 느꼈을 수 있다. 1965년 체제를 준수할 의사가 있는 건가 의심하며, 그 동안 쌓인 불신이 수개월 뒤 경제 문제로 폭발한 것이다. 이제는 법리 문제로 비화해 나 같은 역사학자가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본질은 징용배상 판결과 그를 둘러싼 양국의 대립에 있다.

사회=아베 총리의 대한(對韓) 강경 대응이 동북아시아 구도 재편에 대비한 중장기 구상의 일환이라는 분석도 있다.

남기정=일본이 2016, 2017년 발표한 전략 보고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짧은 간격으로 발행된 두 개의 보고서는 일본이 한반도 정세 변화에 급하게 대응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2017년 보고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역사 문제와 관련해 문재인 정부가 새로운 접근을 해올 수 있지만 일본은 원칙적으로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준수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한일관계 냉각은 불가피하다. 또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접근이 지나치게 빠르다면 미일 공조 하에서 제동을 걸 수 있다. 아베 총리가 보기에 2018년의 상황 전개가 2017년 보고서 내용처럼 가고 있었고, 이런 전략적 사고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 조치의 배경이 됐다는 건 어느 정도 분명하다.

정재정=아베 총리와 그 측근이 보기에 한국은 이렇다. 위안부 합의는 파기하고 화해ㆍ치유재단은 해산했다. 북한에 대한 접근은 지나치리만치 빠르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 국면에서 보인 대중국 태도는 저자세다. 한국은 일본을 대단히 무시하는 것 같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한국을 계획적으로 짓밟겠다는 의도라기보다는 불신이 축적돼 폭발한 것 같다. 소극적이기는 했지만 분쟁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에게 정부가 아예 성의를 보이지 않은 건 아니다. 지난달 19일 한국의 청구권자금 수혜 기업과 패소한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출연하고 그걸로 지금껏 승소한 징용 피해자들의 위자료를 지급하자는 이른바 ‘1+1’안이다.

사회=한국 정부안이 일본 정부는 성에 차지 않는 모습이다.

남기정=아베 정부가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이고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면 자국이 제안한 ‘제3국 중재위 구성’ 시한인 지난 18일과 참의원 선거일인 21일 사이에 고강도 추가 조치가 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외무성 측 발언의 행간을 보면 ‘테이블을 만들어 앉자’는 메시지마저 읽힌다. 출구를 일본도 찾고 있는 것 같다. 남관표 주(駐)일본 한국대사를 불러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장관이 호통을 친 건 ‘대내용 메시지’일 공산이 크다. 양국이 좀더 진전된 안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협상할 가능성은 여전하다. 가령 1+1안과는 별도 트랙으로, 그러니까 대법원 판결과 별개로 한국 정부의 독자 역할을 설정하는 게 관계 개선을 원한다는 일종의 신호가 될 수도 있다.

정재정=사실 1+1안을 제안한 시점이 좀 늦었다. 대법원 판결 직후 한국 정부가 제안했으면 서로의 의견을 폭넓게 교환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일본은 한국에 대고 ‘약속을 안 지킨다’고, 한국은 일본에 대고 ‘정치 문제를 경제로 보복한다’고 서로 맹비난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우리 제안을 일본이 선뜻 받기도 어렵지 않겠나. 결국 필요한 건 물밑 조율이다. 일본이 제안한 중재위를 수용하거나 국제사법재판소(IJC)의 판단에 맡기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남기정=‘정부 주도로 기금을 조성한다’는 식의 특별법 제정도 한일 갈등의 출구가 될 수 있다.

사회=1965년 체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된 건가.

남기정=과거사에 대한 한일 간 인식 차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선 봉합해뒀던 게 청구권협정이다. 당시 합의한 이들도 ‘언젠가 다른 방향으로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듯하다. 지금 그 시점이 온 게 아닌가 싶다. 일본도 1965년보다 상당히 발전된 역사 인식을 보여 왔다. 지난해 대법원 판결이 우리에게 일본을 견인할 기회를 준 것인지 모른다.

정재정=잘못된 것을 바로 잡자며 섣불리 65년 체제를 뛰어넘자고 해버리면 한일관계가 오히려 삽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일본이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총리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나 2010년 간 나오토(菅 直人) 총리의 담화 등에도 우리가 반응을 해줄 필요가 있다. (간 나오토 담화에서 일본 정부는 3ㆍ1운동을 언급하며 식민 지배가 ‘한국 사람들의 의사에 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법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는 없다. 아베 정권의 후퇴를 감안하더라도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은 확실히 나아져왔다. 일본의 공식 입장을 사실상 불법 인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런 게 정치적ㆍ역사적 해결이고 그걸 이뤄내는 게 외교다.

남기정=동의한다. 다만 그게 일본의 일방적 의사 표출이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양국 정부가 역사 인식을 공유해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국제사회의 인식은 일본이 압박을 받을 정도로 진전됐다.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봉합했던 1965년에는 ‘식민 지배’라는 개념이 국제법적 규정에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이탈리아는 과거 식민지로 지배했던 리비아와 ‘식민 통치 보상으로 배상적 투자를 한다’는 내용의 협약까지 맺었다. 액수는 크지 않지만 반성을 표시하고 배상을 한 것이다. 첫 식민지 배상인 이 사건이 국제사회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런 추세를 활용해 일본을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일본 측이 1910년 합병조약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식민 지배가 총체적으로 불법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일본에 더 이상의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일본의 성의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진행=양정대 논설위원 torch@hankookilbo.com

정리=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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