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걸프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1991년 1월17일 오전 2시38분,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 가까운 이라크 레이더기지가 공격을 받았다. 작전명 데저트 스톰(Desert Storm), 즉 ‘사막의 폭풍’의 시작이었다. AH-64 아파치 8대로 구성된 미국 육군 공격헬기 편대는 후속하는 전폭기 편대의 안전을 위해 레이더기지를 파괴했다. 1990년 11월29일, 국제연합은 이라크군이 이듬해 1월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가능한 모든 수단의 사용을 허용한다”고 결의했다. 이라크를 상대로 무력 행사, 즉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였다.
1990년 8월2일, 이라크군은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했다. 쿠웨이트는 어떤 면으로도 이라크의 군사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100만 명 이상의 병력과 5,000대 이상의 전차를 보유한 이라크 육군을 막아낼 쿠웨이트 육군 병력은 1만6,000명이 전부였다. 이라크군은 공군기의 공습과 특수부대의 수도 장악까지 곁들인 끝에 쿠웨이트 영토 대부분을 반나절 만에 점령했다. 같은 날, 국제연합은 이라크군의 침공을 비난하면서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국제연합의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후세인은 왜 미국 눈 밖에 났나
1908년 영국 광산업자 윌리엄 녹스 다시가 페르시아에서 유정을 발견한 사건은 일부에게는 축복이었지만 다수에게는 재앙이었다. 1911년 영국 해군장관이 된 윈스턴 처칠은 군함의 주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는 일에 앞장섰다. 석탄은 석유에 비해 장점보다 단점이 많았다. 열효율이 떨어지기에 최고속도와 항속거리가 떨어졌고, 시커먼 연기가 발생해 먼 거리에서도 쉽게 함대의 위치가 노출됐으며, 전투시에는 항속거리를 늘리고자 쌓아둔 갑판의 석탄을 급하게 바다에 내다버려야 했다.
그럼에도 전환 결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영국 본토의 석탄 매장량은 풍부했지만 석유는 나지 않아서였다. 석유의 안정적 확보는 전환의 선결과제였다. 1차대전이 발발하기 한달 여 전인 1914년 6월 처칠은 영국 하원을 설득해 다시가 세운 영국-페르시아석유회사의 주식 51%를 획득하게 했다. 전세계 바다를 지배하던 제국주의 영국은 이제 아랍의 석유를 자신의 생명줄로 여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영국석유(BP)로 이름을 바꾼 영국-페르시아석유회사는 순이익의 16%만 이란에 주고 나머지는 모두 가져갔다. 계약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한 이란인들은 개정을 요구했지만 영국은 이란 왕 레자 팔레비와 결탁해 이를 무산시켰다. 2차대전 중에는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침공해 점령했다.
2차대전 후 선거로 뽑힌 이란 수상 모하마드 모사덱은 자국 내 유전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미국과 영국은 레자 팔레비의 아들인 모하마드 팔레비와 결탁해 모사덱을 실각시켰다. 미국은 부패한 팔레비의 권력 유지가 자국 이익에 부합한다고 결정하고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령, 팔레비의 이란은 1976년부터 F-14 톰캣 79기를 인도받았다. 이는 1974년 미 해군에 배치된 최신예 전투기 톰캣이 수출된 지금까지도 유일한 경우였다.
1979년 1월 이란인들은 혁명을 통해 팔레비를 쫓아냈다. 미국은 이제 이란을 무너트리길 원했다. 이란의 옆 나라 이라크에서는 1968년 쿠데타를 통해 아메드 하산 알-바크르가 권력을 쥐었다. 바크르는 1972년 소련과 군사 분야를 포함한 우호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바크르의 이라크를 약화시키기 위해 이라크로부터 독립하기를 희망하는 쿠르드인들을 지원했다.
바크르는 서구의 의도대로 조각나 있지 말고 하나의 범아랍인국가로 통일해야 한다는 지론의 소유자였다. 1979년 바크르는 이라크와 시리아 간 통일을 위한 조약을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와 체결했다. 이라크 첩보조직을 장악한 2인자 사담 후세인은 1979년 6월 강제로 바크르를 끌어내리고 대통령이 되었다. 이는 서구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위였다. 후세인은 1980년 9월 이란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은 만 8년간 계속된 이란-이라크전쟁 중 다양한 방식으로 이라크를 지원했다.
◇미국의 선택지, 이라크의 선택지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에 대해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군대를 보내는 방안이었다. 군대를 보내도 100만 명 이상의 병력과 10년 가까운 실전 경험을 가진 이라크군을 물리친다고 속단하기는 어려웠다.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적지 않은 병력 손실을 감수해야 할지도 몰랐다. 10여 년 전의 미국-베트남전쟁에서 수많은 미국 젊은 병사들이 죽고 다침에 따라 미국은 특히 자국군의 인적 피해에 민감했다. 다른 선택지는 무력 대응을 삼가고 외교적 해결을 시도하는 방안이었다.
이라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도 크게 보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제연합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대로 쿠웨이트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유지하는 안이었다. 다른 하나는 국제연합의 요구에 응해 군대를 철수하는 대안이었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 최선의 시나리오는 외교적 해결을 시도해 성공하는 경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국군의 병력 피해를 걱정할 일도 없고 막대한 전쟁 비용을 쓸 일도 없었다. 파병을 통해 이라크군을 철수시키는 경우는 차선의 시나리오였다. 같은 목표가 달성됐지만 적지 않은 파병 비용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로 좋은, 즉 차악의 시나리오는 파병했지만 이라크군이 철수하지 않고 버티는 경우였다. 전쟁의 결과가 불확실한데다가 설혹 이긴다 치더라도 엄청난 피해를 볼 가능성이 상당했다. 마지막 최악의 시나리오는 외교적 해결을 선택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는 경우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로서는 재선되기 어려울 시나리오였다.
후세인의 선택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미국의 선택은 쉬울 수 있었다. 후세인이 알아서 철군한다면 당연히 외교적 노력을 선택하는 쪽이 미국에게 유리했다. 하지만 후세인이 철군하지 않는다면 외교적 노력은 미국에게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훤히 드러나고 만 이라크의 패
이라크의 선택을 미리 알 수 없으니 미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입장에 처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흥미롭게도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를 이해하려면 입장을 바꿔 볼 필요가 있다.
후세인의 입장에서 미국이 외교적 노력을 선택하면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는 쪽이 유리했다. 철군하면 모처럼 획득한 새로운 영토와 막대한 유전을 포기하게 되지만 철군하지 않으면 다 갖게 되는 셈이었다.
미국이 군대를 파견하더라도 철수하지 않고 버티는 쪽이 후세인에게 더 나았다. 미국의 군사적 대응에 굴복해 철군했다가는 곧바로 정치 생명이 끝날지도 몰랐다. 버티다 보면 미군이 물러갈 가능성도 있었고, 또 전쟁이 벌어져도 이기지 말란 법이 없었다. 미국이 어떤 선택을 하든 후세인은 쿠웨이트 점령을 유지하는 게 경제적 관점에서 합리적이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면 미국의 결정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후세인이 철군하지 않을 테니 외교적 노력은 무용지물이었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군사적 행동뿐이었다. 미국에게 전쟁은 결코 낯선 영역이 아니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룬 방법이 바로 전쟁이었다. 독립 후에는 북아메리카에 살던 수많은 인디언 부족을 상대로 100년 가까이 정복전쟁을 치렀다. 19세기에는 스페인과 멕시코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영국ㆍ프랑스와 함께 2차아편전쟁에서 청을 공격했으며, 남과 북으로 나뉘어 내전을 치렀다. 20세기 초반에는 니카라과, 아이티, 도미니카를 공격해 점령했고, 걸프전쟁 전에는 그라나다와 파나마를 침공했다.
미국은 혼자서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았다. 미국 외 34개 국가가 이른바 다국적군의 일원이 되었다. 물론 95만 명에 달하는 다국적군의 주력은 70만 명 가까이 참전한 미군이었다. 전쟁비용은 예상대로 어마어마했다. 미군은 당시 돈으로 70조 원 이상을 썼다. 그 돈 모두를 미국인들이 짊어지지는 않았다. 그 중 약 60조 원을 다른 나라가 지불했다. 자신들의 왕정 체제에 큰 위협이라고 느낀 중동국가들이 40조 원 이상을, 그리고 헌법상 파병이 불가능한 경제대국 독일과 일본이 각각 7조 원과 12조 원 정도를 맡았다. 걸프전쟁은 1991년 2월28일 다국적군의 승리로 끝났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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