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 움직일 지렛대 가진 나라… 적극적 역할 촉구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는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 조치로 악화하는 한일 갈등 상황에 대해 한일 양측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한일간 대화를 촉구하면서 한일 갈등 해소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지만, 어느 한쪽 편을 드는 상황을 꺼리며 직접적인 개입에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외교가에선 한국과 일본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를 가진 나라는 결국 미국밖에 없어 보다 적극적인 역할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에반 메데이로스 조지타운대 교수는 지난 15일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은 한일 양측이 귀를 기울일 유일한 행위자”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즉각 한일 두 정상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를 시작하도록 권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을 지낸 그는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14년 한일 두 정상간 회의를 마련했던 사례를 거론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일 갈등을 중재할 해결사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셀레스트 애링턴 조지워싱턴대 교수도 한국일보에 “미국이 보다 적극적으로, 단 조용히 개입해야 한다”면서 “미국은 마술적인 해결책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한일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아주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애링턴 교수는 18일 WP 기고문에서도 오바마 정부가 한일 갈등을 중재했던 사례를 거론하면서 미국의 중재가 한일갈등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문했다. 그는 “미국은 서울과 도쿄를 움직일 고유의 레버리지를 갖고 있다”며 “한국 입장에서 미국은 대북관계를 진전시키는데 결정적인 나라이며, 일본의 경우 미국과의 무역협상이 예고돼 있다”고 말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21일 사설에서 아예 일본의 수출 규제를 “어리석다”고 직격탄을 날리면서 일본이 먼저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 뒤 “미국은 북한과의 평화 노력을 추구하는 데 미국의 도움이 절실한 문재인 대통령이 신속하게 화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의 압박으로 수출 규제조치를 푸는 모양새는 일본이 취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일본이 먼저 행동에 나서고 한국 정부도 강제 징용 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요구하는 제3국 중재위 구성안을 받아들이는 수순을 택하도록 미국이 중재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미국 역할론’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동맹 관리 차원이 아니라 한일 갈등이 악화하면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크게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대북 공조뿐만 아니라 트럼프 정부의 핵심 의제인 중국 견제도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데이로스 교수는 “중국은 아시아 전역, 특히 해상 영토에서 보다 공격적인 자세를 취해왔다”며 “미 동맹국의 제약이 없으면 더 많은 일을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23일 한국방공식별구역을 진입하고 러시아의 조기경보통제기가 독도 인근 영공까지 침범한 사건이 이 같은 우려를 더욱 확산시켜 미국 역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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