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자유무역협정(FTA)
중국,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쟁취한 독립, 뒤이은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 역사는 종종 ‘전쟁의 역사’로 표현된다. 하지만 중국과 프랑스,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베트남은 현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누리는 중이다. 견실한 경제성장까지 이어지고 있어 ‘태평성대’가 부럽지 않다. 그러나 베트남은 만족하지 않고 있다. 80년대 말 경제 개방ㆍ개혁 정책인 ‘도이머이(쇄신)’로 일약 주요 신흥국으로 자리매김한 베트남은 이제 과감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경제영토까지 빠르게 넓히는 중이다.
◇베트남, 유럽을 끌어안다
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으로 전세계가 시끌벅적하던 지난달 30일, 하노이에서는 베트남 역사에 한 획으로 기록될 사건이 진행됐다.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에 도장을 찍은 일이다. 아시아에서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에 이어 4번째, 동남아 개발도상국 중에서는 최초로 EU와 맺은 FTA다.
양 측 의회의 비준안동의 절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베트남 측이 연내 비준을 다짐하고 있는 만큼 연말 또는 내년 초 유럽연합베트남FTA(EVFTA) 발표가 유력시 된다. EU가 베트남에 노동분야 국제협약 준수를 강하게 요구하면서, 협상은 진작에 마치고도 서명까지 4년이 걸린 FTA다.
EU와의 FTA 체결로 베트남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양측 의회의 비준으로 EVFTA가 발효되면 EU는 즉시 베트남 상품 70.3%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고 7년 내 99.7%에 대한 관세를 없애게 된다. 사실상 모든 상품이 해당된다. 동시에 베트남도 발표 즉시 EU 상품 64.5%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고 7년 안에 97.1%를 무관세로 수입하게 된다.
내년부터 베트남으로는 EU 자동차와 기계가, EU로는 베트남 농산품과 의류가 더 많이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EU에 419억 달러어치를 수출한 베트남은 그 규모가 2030년까지 44% 이상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는데, 든든한 성장 엔진 하나를 더 장착한 베트남은 EU 의회의 조속한 비준처리를 고대하고 있다.
◇ 자국 발전 도구로서의 FTA
이번 EVFTA는 베트남이 직간접적으로 체결한 13번째 FTA가 된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 가입 후 1993년 회원국간 최초로 아세안FTA(AFTA) 체결 이후 26년만이다. 이후 10년만인 2003년 아세안이 중국과 맺었고 2007년부터 4년 연속 한국 일본 중국 인도 호주 뉴질랜드로 시장을 확대했다.
최근 들어서는 양자관계 외에도 복수 국가들로 구성된 경제블록들과의 FTA체결이 특징이다. EU에 대응하기 위한 서유럽 국가들의 모임인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베트남을 포함 11개국이 참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연말이나 내년 초 발효가 예상되는 EVFTA가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베트남 산업통상부 산하 경제연구소 빈 단 탄 국장은 “국제 사회와의 결속을 강화함으로써 기본적으로 수출시장 다변화로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며 “이 외에도 선진 외국 직접투자(FDI) 유입을 촉진하고 국내 산업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국 산업 기술 수준을 향상하기 위해서라도 ‘개방’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자유무역협정과 관련된 뚜렷한 청사진을 내놓고 있진 않지만, 어느 쪽에도 편들지 않는, 특유의 중립적인 경제ㆍ외교적 자세로 각국과 관계를 다져가고 있다. 베트남 관료들은 ‘베트남은 모든 나라와 친구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각국과의 관계 구축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 FTA ‘양날의 칼’ 되나
하지만 농업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산업 기반이 자리를 잡지 못한 베트남이 광범위하게 FTA를 추진하는 것과 관련해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지난 30일 EVFTA 서명식 후 기자회견을 가진 쩐 투언 안 상공부 장관은 “거대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하다”면서도 “선진국들의 제품ㆍ서비스와 경쟁은 물론 엄격한 규제에 대해서도 대응해야 한다”며 향후 베트남 입장에서는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님을 내비쳤다.
베트남이 최근 FTA를 광범하게 추진하는 배경으로 미중 무역전쟁 등 글로벌 사업 환경 악화에 따른 ‘조바심’ 영향도 거론된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베트남의 기업 환경 순위는 올해 69위 수준으로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역내 대국들에 비해서도 높은 편이다.
권율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신남방경제실 선임연구위원은 “경쟁국들에 비해 보다 나은 기업 환경에도 불구하고 선진 경제 블록들과 FTA를 체결, 환경ㆍ노동 분야 개혁에 박차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기업의 사회적 가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 고조가 예상되는 만큼, 진출 기업들은 단기적인 이익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계획을 세우고, 사업을 끌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호찌민=정민승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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