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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적도에서 방향을 잃다

입력
2019.07.24 04:4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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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 키토의 적도에 서서 ©게티이미지뱅크
에콰도르 키토의 적도에 서서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자동차, 엘리베이터, 에어컨을 꼽곤 한다. 내 삶을 정말 편안하게 해 준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다들 좋지 않게 쳐다본다. 석유중독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인데. 하지만 나도 체면이 있는지라 가끔 가다가 딴 이야기를 한다. 바퀴, 종이, 나침반이라고 말이다. 나침반은 방향을 알려주는 너무나도 간단하면서도 편리한 장치다. 하지만 항해자가 아니고서야 나침반을 가지고 다닐 일은 없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이라는 아주 편리한 장치가 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은 낯선 곳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낯선 곳으로 갈 때 자동차가 출발하는 순간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카페에서 나와 숙소로 향해야 하는데 왼쪽 길로 가야 하는지 오른쪽 길로 가야 하는지 처음에는 모르는 것이다. 차가 움직여야 그때서야 방향을 제대로 알려주곤 한다.

내비게이션이 자동차 출발 초기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까닭은 화면에서 위쪽이 그냥 전면일 뿐 어떤 방향을 알려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공대에 재직하고 있는 어떤 수학자는 내비게이션 화면의 위쪽이 항상 북쪽을 향하게 지정해 놓았다. 운전석에 앉아서 내비게이션을 켜는 순간 동서남북을 알 수 있다. 길을 모르더라도 카페와 숙소 사이의 방위만 알고 있다면 처음 나서는 길을 헷갈리지 않고 갈 수 있다.

서호주의 광대한 사막을 탐험한 적이 있다.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런데 노란 바탕의 화면에 파란 줄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냥 사막에서 앞으로 쭉 나가면 된다는 뜻이었지만 나는 내비게이션이 망가졌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우리에게는 태양이 있으니까 말이다.

북반구나 남반구나 해가 뜨는 쪽은 동쪽이다. 그리고 해가 뜨는 쪽을 오른쪽에 두었을 때 내 앞쪽이 북쪽이다. 그런데 그림자의 이동방향이 다르다. 북반구에서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지기 때문에 낮에는 나무 그림자가 북쪽을 향한다. 하지만 남반구에서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진다. 따라서 낮에는 나무 그림자가 남쪽을 향한다. 그러니 자신이 북반구에 있는지 남반구에 있는지만 잊지 않고 있으면 해든 달이든 별이든 천체를 이용해서 방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비만 오지 않으면 말이다. (비가 많이 올 때는 멈추는 게 여행사의 당연한 자세다.)

갈라파고스에 가려면 에콰도르에 들러야 한다. 에콰도르는 나라 이름 자체가 스페인어로 ‘적도’라는 뜻이다. 에콰도르에 간 사람치고 수도 키토에 있는 ‘적도공원’에 들리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보면 특별히 볼 것은 없다. 하지만 한 발은 북반구에 다른 한 발은 남반구에 딛고 서보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 간다. 또 코리올리 힘이 작용하지 않는 현장을 목격하고 싶기도 하다.

지구는 자전하기 때문에 그 위에 있는 물체는 힘을 받는다. 이것을 코리올리 힘 또는 전향력이라고 한다. 북반구에서 태풍이 오른쪽으로 돌면서 이동하고 변기물이 오른쪽 방향으로 돌면서 빠져나가는 게 바로 코리올리 힘 때문이다. 남반구에서는 반대쪽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적도에서는 어떨까? 코리올리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로켓발사대가 적도지방에 존재한다.

적도에 왔으니 다른 사람처럼 못 위에 달걀을 세워보려고 시도해봤다. 세우지 못했다. 코리올리 힘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못 위에 달걀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적도가 아닌 지역이라고 해서 절대로 서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냥 운과 재주다.

마침 내가 갔을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해가 거의 정확히 내 머리 위에 있었다. 이때 나는 방향을 잃었다. 동서남북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한국이나 호주에서는 정오에도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태양이 정확히 내 머리 위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깨달았다. 중심에 서면 방향을 잃는다고 말이다. 어느 정도 한쪽으로 치우쳐야 판단력이 생긴다.

우리는 중용(中庸)을 말한다. 그런데 중심에 서는 게 중용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양쪽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봇대의 무게 중심은 한가운데에 있지 않다. 역사적인 변화 앞에서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내가 적도에 서 있을 때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그 소식을 잘 터지지도 않는 와이파이로 전해 들으면서 감격에 빠졌다. 그런데 그때도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들의 헛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인 소용돌이 안에 있다.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다. 35년 동안의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광복 74년을 곧 맞는 이때 일본이 다시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이번에는 무역전쟁으로. 전쟁 때는 한쪽에 서야 한다. 가운데 있다고 해서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게 아니다. 그런데 여전히 중심에 서려는 사람들이 있다. 한가하게 양측을 비판한다. 당연하다. 그들은 적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적도에서는 방향을 잃는다. 방향을 모르겠으면 중심에서 벗어나라.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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