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지연에 재판부가 직권 결정… 외출ㆍ여행 가능, MB보다 조건 완화
“지금 한창 재판이 진행 중이니까 신병 관계가 어떻게 됐든 제가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앞으로 성실하게 재판에 응할 것입니다.”
22일 오후 5시 4분쯤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 법원의 직권 보석 결정으로 지난 1월 24일 이후 179일만에 석방된 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은 검은 정장에 흰 와이셔츠, 노 타이 차림이었다. 꽤 밝은 표정이었고 몰려든 취재진을 보고는 엷은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앞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부장 박남천)는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 직권 보석 결정을 내렸다. 보석 결정은 예상된 바였으나, 한 때 양 전 대법원장 측이 이를 거부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돌기도 했다. 구속만기로 석방되면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지만, 보석 석방 때는 법원이 내건 조건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직 사법부 수장이 법원 결정에 불복할 경우 비난 여론이 거세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 법원의 보석 결정 3시간여 만에 이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엔 뇌물 등 혐의로 재판받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보다 보석조건이 덜 까다롭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 대법원장 보석 조건은 △경기 성남시 시흥동 자택에만 머물 것 △사건관계자 및 그 친족과의 접촉하지 말 것 △보증금 3억원 또는 이에 상응하는 보증보험에 가입할 것 등이다. 조건을 어겼을 경우 보석 취소로 다시 구치소로 가야하며 보증금이 몰수되거나 1,0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물 수도 있다. 엄격하지만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이 전 대통령과 달리 양 전 대법원장은 외출이 가능하고, 법원 허가만 받으면 3일 이상 여행하거나 출국할 수도 있다.
법원의 이번 직권 보석 결정은 고육지책이다. 양 전 대법원은 지난 2월 11일 재판에 넘겨졌으나 공방을 주고받는 재판다운 재판은 구속 4개월만인 5월29일에서야 본격화됐다. 공소장 일본주의(검사가 피고인을 기소할 때 공소장만 법원에 제출하라는 형사소송법 원칙) 논란 등으로 재판이 한정 없이 늘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법원행정처 문건에 대한 원본 대조 작업을 고집하면서 재판 때마다 문서를 일일이 읽어 내려가며 글씨체나 희미하게 찍힌 도장 흔적까지 세세하게 지적하며 검찰의 설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 상태론 구속기한 만기(6개월)인 8월 10일까지 1심 선고가 도저히 이뤄지기 어렵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증인으로 법정에 나와야 할 현직 법관들이 본인들의 재판 일정 등을 이유로 출석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검찰 측 증인 212명 가운데 증인신문을 한 사람은 단 4명뿐이다. 재판부는 결국 지난 12일 직권 보석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했다. 검찰도 석방조건을 엄격히 한다면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밝힐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피고인인 양 전 대법원장 측이 보석 조건을 까다롭게 할 경우 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반발하는 등 이례적인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양 전 대법원장 보석을 보는 법조계의 시선은 따갑다. 검사장 출신 한 변호사는 “속 의도야 재판 지연일지 몰라도, 법률에 따른 권리행사이기도 하지 않느냐”고만 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서류 증거 조사 등이 예정돼 있는 23일 재판부터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출석할 예정이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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