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만과 클라라 부부의 사랑은 고전 음악사의 유명한 러브스토리다. 슈만의 제자 브람스까지 끼워 넣으면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예술사의 꾸민듯한 정점이 된다. 브람스는 14세 연상의 클라라를 사랑했고, 그 사랑은 브람스가 바라던 형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삶과 사랑에 대해서는 정설이라 할 만한 게 사실 없다.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다 다르고, 심지어 다른 버전의 이야기도 있다. 분명한 것은, 슈만과 브람스의 곡을 가장 적극적으로, 대개는 가장 먼저 세상에 알린 게 클라라였다는 사실이다.
남편 슈만이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한 1854년, 35세의 클라라는 7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2년 뒤인 1856년 7월 29일 슈만은 별세했다. 23세 청년 브람스가 짝사랑하던 클라라에게 편지로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것도 슈만이 떠난 그 해였다. 한 차례 약혼-파혼을 행한 브람스는 독신으로 살며 평생 클라라를 바라보았다고 알려져 있다.
클라라는 아이들과 먹고 사느라 쉼 없이 연주 공연을 다녀야 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만큼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그는 남편 못지 않게 이름난 피아니스트였지만, 당시는 작곡으로든 연주로든 음악만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기 힘든 때였다.
심한 우울증과 환각ㆍ환청에 시달리던 슈만이 43세이던 1854년 2월 라인 강에 몸을 던진 덴, 클라라에게 짐이 될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망상에 빠져 아내에게 물리적인 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다고 한다.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마음을 짐작했을 수도 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이틀 전까지 클라라와의 면회를 거부한 채 제자 브람스를 통해 아내와 아이들 소식을 들었다. 병원 측이 면회를 금지했다는 설도 있다.
클라라의 주요 레퍼토리는 당연히 그가 사랑한 슈만과 그를 사랑한 브람스의 곡이었다. 그는 음악으로 빵을 벌며 두 연인에 대한 애정을 실천했다. 그에게 음악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의 형식이었다.
클라라 탄생 200주년이던 2016년 유럽서 꽤 성대한 기념행사들이 열렸다. 클라라가 없었다면 슈만과 브람스의 운명이 달라졌을 수 있다고 말한 이들이 있었다. 거기서 말한 운명은 그들 작품의 운명만 뜻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평가는 뮤즈가 아닌 연주자 클라라에 대한 평가이기도 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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