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소재 국산화는 오랜 숙제지만
완제품 집중한 건 선택이자 전략
경제보복이 탈일본의 기폭제되길
지난 16일 국회에서 열린 일본 경제보복대책 당청 연석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최재성 일본경제보복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일본의 반도체산업, 특히 메모리 쪽은 명맥이 끊어진 상태다. 낸드플래시의 원조인 도시바 정도가 남아있지만 하이닉스가 포함된 외국연합군에 지분을 내준데 이어 곧 사명까지 포기할 예정이다.

일본 반도체에 이런 굴욕을 안긴 건 알다시피 삼성전자이고 하이닉스다. 하지만 세계 메모리시장의 70%이상을 장악한 이 무적의 회사들도 일본이 몇몇 화학물질(불화수소 레지스트)만 통제하면 핵심공정을 진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베 정부의 경제보복을 통해 드러났다. 허약한 국내 부품소재산업 기반을 딛고 일본제 소재와 물질로 일본 반도체산업을 꺾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기적은 과연 신기원일까 신기루일까.

이 점에서 지난주 박영선 중기벤처부 장관과 최태원 SK회장간에 오갔던 논쟁은 짧았지만 아주 의미심장했다. 먼저 박 장관이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를 겨냥해 “국내 중소기업도 불화수소를 만드는데 대기업이 안 산다”고 지적하자 최 회장은 “품질 때문”이라고 일축했고 이에 박 장관은 “20년전부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R&D를 했다면 지금 어땠을까”라고 다시 꼬집었다. 국내 부품소재산업의 낙후 원인을 둘러싼 ‘대기업책임론’과 ‘품질격차론’이 맞선 것이다.

소재부품의 자립은 오랜 숙제다. 대기업들이 소홀했다는 것도 팩트다. 하지만 이걸 대기업의 근시안이나 탐욕 탓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의 성장전략은 속도였다. 자원을 총동원해 짧은 시간 안에 선발자를 추격하고 추월하는 방식이었다. 황창규 KT회장이 삼성전자 시절 만들어낸 ‘황의 법칙’은 반도체용량이 1년에 2배씩 늘어난다는 것으로 기존 ‘무어의 법칙’(18개월에 2배씩 늘어난다)을 6개월 앞당긴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 이론이라기 보다는 삼성전자의 전략과 성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삼성전자는 최고의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만 사서 썼다. 장비는 네덜란드 독일 미국에서, 소재와 물질은 일본에서 사왔다. 그렇게 해서 1년에 D램 용량을 두 배씩 늘렸고 결국 반도체 시작 20년도 못돼 일본 미국을 누르는 신화를 쓰게 된 것이다. 만약 소재 부품 개발에 직접 매달리고, 무조건 국산 제품을 우선했다면 세계 1위 달성은 훨씬 늦춰졌거나, 어쩌면 영영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한 반도체 전문가는 “소재부터 완제품까지 국내에서 수직계열화를 하면 조달상의 장점은 있지만 품질이 좀 떨어져도 계열제품을 쓰는 경향이 커 오히려 완제품에는 마이너스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압도적 부품소재산업을 갖게 된 건 반도체 이전 이미 기계 화학 등 기초산업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게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과연 부품소재와 완제품을 동시에 키우며 세계 1위까지 달성하는 게 가능했을까. 부품소재보다 완제품에 집중한 건 탐욕의 소산이 아니라 선택이자 전략이었던 것이다.

부품소재 국산화가 숙제이긴 하지만, 국산보다 외국산의 품질이 뛰어나다면 기업으로선 그걸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얼마든지 해외에서 제품을 조달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글로벌 공급체인이고 국제 분업체계다. 오늘날 글로벌 제품들은 다 이런 식으로 생산되는데, 이 시스템을 깬 것이 바로 일본의 경제보복이다. 보복이라고 다 같은 보복이 아니다. 국제 분업체계 안에서 구매자와 공급자는 기본적으로 파트너 관계인데, 수입쿼터나 고율관세를 부과하는 트럼프식 무역보복은 자국산업보호를 위해 경쟁자에 불이익을 주는 정도이지만, 아베식 경제보복은 파트너의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훨씬 악의적이고 파괴적이다. 이 글로벌 체인에 참여하고 있는 일본 기업들도 공급 중단에 따른 신뢰 상실의 대가를 치르게 됐다.

보복이 철회되더라도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삼성전자나 하이닉스는 일본 기업과 거래를 다시 생각할 것이고, 대체수입선과 국내 제품 개발에 좀 더 관심을 둘 것이다. 어쩌면 보복의 고통이 부품소재 국산화를 몇 년은 앞당기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700여가지나 되는 반도체 관련 물질을 다 국산화할 수는 없는 일. 국산화 자체가 목표일 수는 없으며, 자칫 대기업에게 압박은 더욱 안될 일이다.

이성철 콘텐츠본부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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