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한국전력공사 서초지사 모습. 연합뉴스

‘도축 수수료 인하를 전제로 도축장 전기요금을 2024년까지 20%까지 인하한다.’

2014년 말 한ㆍ호주 및 한ㆍ캐나다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앞두고 당시 여야정 협의체가 작성한 합의문의 조항이다. 당시 협의체는 FTA에 따른 축산업계의 피해를 우려, 도축장에서 소ㆍ돼지 등을 도축할 때 발생하는 전기요금의 20%를 10년간 깎아주기로 합의했다. 도축장 전기요금이 인하되면 축산농가들이 부담하는 도축 수수료가 낮아진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 정책을 두고 한국전력과 도축업계간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최근 한전이 도축장 내 가공시설은 “전기료 인하 대상이 아니다”라며 과거 3년치 할인금액을 반환하라고 개별 도축장에 통보하면서다. 도축업계는 “농가 부담을 덜어주는 여야정 합의의 취지를 거스르는 한전의 일방적인 갑(甲)질”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 양측의 갈등이 소송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전 “3년치 전기료 할인액 돌려달라”

도축은 ‘소ㆍ돼지 등 기절→탈모 및 박피→이분체(머리, 발, 내장을 제거한 뒤 좌우 이등분)→등급판정→가공ㆍ포장(등심ㆍ안심 등 부위별 분할)’ 등을 거친다. 엄밀히 구분하면 가공ㆍ포장 이전 단계는 ‘도축시설’, 가공ㆍ포장은 ‘가공시설’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대형 도축장은 신선도 유지 등을 이유로 이 같은 도축과 가공시설을 한 장소에 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제 한전 또한 2015년 전기요금 인하를 앞두고 현장 실사를 진행한 후, 도축과 가공시설 모두 ‘도축장’이라고 판단해 요금을 깎아줘 왔다.

21일 도축업계와 한전에 따르면 작년 말 한전은 갑자기 “가공시설은 인하 대상이 아니다”며 전국 도축장 8곳에 가공시설에 대한 과거 3년치 할인액을 환급하라고 통지했다. 농협중앙회가 운영하는 도축장 3곳(부천ㆍ나주ㆍ고령)에 대한 소급반환 청구액만 10억원에 달한다. 또 한전은 향후에도 도축 관련 시설에만 요금을 인하하겠다고 통보했다. 가공시설엔 따로 계량기를 설치해 일반 전기요금을 납부하라는 것이다. 한전 관계자는 “지점 몇 곳에서 ‘도축장 안에 가공시설이 있을 땐 어떻게 해야 하냐’는 문의가 와서 일제조사를 했다” 며 “가공시설은 여야정 합의 기준인 ‘도축장’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도축장 전기요금 인하 관련 일지_신동준 기자/2019-07-21(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소 돼지 도축 및 가공 주요공정_신동준 기자/2019-07-21(한국일보)
◇도축업계 “한전 갑질에 농가 피해”

도축업계는 한전의 기습통보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자신들이 잘못 판단해 할인해준 금액을 이제 와서 토해내라고 하는 것은 갑질”이라고 주장했다. 또 한전이 임의적으로 전기요금 할인범위를 재설정하는 것은 2014년 당시 국회, 산업통상자원부, 농림축산식품부가 모두 모여 논의한 ‘여야정 합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국 소ㆍ돼지 도축장을 회원사로 둔 한국축산물처리협회 관계자는 “한전이 정책을 바꾼다면 산자부를 통해 국회와 농식품부, 도축업계와 협의하는 등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그냥 ‘요금 올린다’고 통보하니 당혹스럽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대규모 적자가 누적된 한전이 각종 할인정책에 대한 무리한 구조조정에 나선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이번 조치가 농가에 ‘연쇄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게 도축업계 주장이다. 축산물처리협회에 따르면, 소ㆍ돼지 도축수수료 중 도축장 전기요금 인하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5%다. 돼지 1마리당 약 200원(도축수수료 2만원 기준) 수준이다. 협회 관계자는 “연간 돼지 도축량이 1,650만 마리라 농가 부담이 33억원 늘어난다”고 주장했다. 소 도축량 또한 연간 100만 마리 수준이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공문도 발송하고 국회 중재도 요청하는 등 다각도로 한전에 재검토를 요청하고 있지만 묵묵부답”이라며 “소송 등의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한전 측은 “170여개 도축장 중 할인액을 반환 청구한 곳은 8곳뿐”이라며 “나머지는 도축시설만 있거나, 가공시설이 있어도 도축장의 10%를 넘어서지 않는 곳이라 이번 조치와 무관하다”고 반박했다.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세종=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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