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문제 日 경제 보복 해결 어불성설
정부 외교협상 적극적이었는지도 의문
피해자 의견 담은 협상안 구체화해야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로 고조된 한일 갈등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격화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소원한 관계가 지속되던 한일은 사실상의 위안부 합의 파기에 이어 대법원 징용 배상 판결로 눈에 띄게 정면 대결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한일 관계는 외교 단절 직전까지 갔던 적이 몇 번 있었으니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든 더는 갈등을 고조시키지 말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지금은 상대국을 향해 열을 내고 있지만 양국 지도자의 속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당장 중요한 위기가 무엇이고, 또 이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돌아봐야 한다.
미국의 위기관리 전문가 스티븐 핑크가 쓴 책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진짜 위기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새 정장 차림으로 길을 가던 남자가 갑자기 폭우를 만났다. 비를 피하려고 한 건물로 들어서자 사나운 개의 습격을 받는다. 개를 피해 바깥으로 나오다가 이번에는 길가던 여자와 부딪힌다. 넘어졌다 일어선 여자가 자기 아기는 어디에 있느냐고 소리를 친다. 둘러보니 유모차 한 대가 찻길로 내려가고 있었고 이를 피하려는 자동차들의 급브레이크 소리가 이어진다. 위기가 중첩되었지만 이 상황에서 진짜 위기는 아이를 구하는 것이다.
이번 한일 갈등 역시 여러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 사실상의 위안부 합의 파기, 징용 배상 판결, 일본 초계기 레이더 조사(照射) 논란이 있었고, 이어 징용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의 대립이 커져갔다. ‘침략’이니 ‘전쟁’이니 하는 말들이 등장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한 직접적인 책임은 일본이 져야 마땅하다. 반도체 소재 관련 3개 품목 수출 규제에 이어 통상 우대 조치인 ‘화이트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겠다고까지 공언한 것은 대화와 협상을 통해 외교로 해결해야 할 사안을 경제 보복으로 풀어보겠다는 수작에 다름 아니다.
일본 정부는 느닷없는 수출 규제 이유가 애초 징용 문제와 관련 있는 듯하다가, 그게 아니라 해당 물자의 북한 수출 때문인 듯 받아들여지는 말을 흘렸다가, 다시 그것도 아니라 구체적인 사례는 입을 닫은 채 수출 관리상의 부적절한 사안 발생이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행태가 이미 정당한 수출 규제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애초부터 이 규제를 징용 문제와 무관하다고 본 사람은 사실 한일 통틀어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출 규제로 증폭된, 일파만파로 커질 수 있는 당면한 ‘진짜 위기’를 일본이 결자해지로 먼저 풀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대법원 징용 판결 이후 주도적인 외교적 해결 노력의 책임을 사실상 방기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온 문재인 정부도 부작위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삼권분립만 강조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그런 논리라면 일본 대법원이 배상할 이유가 없다고 했으니 일본 정부의 버티기에도 이유가 없지 않다. 피해자들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문재인 정부의 방향은 틀리지 않지만 정작 피해자들의 의사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는지는 의문이다. 피해자들이 정부와 처음 제대로 이야기해본 것이 불과 두 달 전이라고 한다. 그래 놓고 지금도 청와대 관계자가 “100% 피해자 합의”가 있는 협상 방식은 얼마든지 따르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정부는 피해자들이 어떤 형태의 협상을 원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지체 없이 전방위로 움직여야 한다. 단지 의사 파악만으로는 모자란다. 한일 맞대결 시나리오를 설명하고 일본과 협상 가능한 방식을 토대로 피해자들의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부당한 수출 규제에 맞서 일본에 당당하게 큰소리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위기의 본질을 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 전략을 강구해 이를 관철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력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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