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0일 판문점에서 남ㆍ북ㆍ미 정상이 만났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역사적인 순간을 누구보다 특별한 의미로 맞이했을 사람들 중에 배우 문성근(66)이 있다. 평생 통일운동에 헌신한 아버지 문익환(1918~1994) 목사가 떠올라 감격했을 것이고, 자신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평창남북평화영화제(평창영화제)를 생각하며 안도했을 것이다.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영화제 출범 준비에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 온 터였다.
그날 이후 거짓말처럼 상황이 급변했다. 꽉 막혀 있던 실무가 척척 풀려 나갔고, 비로소 기업 협찬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은 영화제도 이렇듯 큰 영향을 받을진대 더 큰 단위에선 어떠할지 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래서 평화는 이념이 아닌 실체다. 1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마주한 문성근 평창영화제 이사장은 “남북 관계가 어려울수록 더욱더 소통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이제야 걱정, 고민 내려놓고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평창영화제는 최문순 강원지사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지난해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꽃피운 남북 교류 협력을 문화 예술 영역으로 확장시켜 가자는 제안이었다. 영화계는 적극 동조했다. 문 이사장을 필두로 강원영상위원회 위원장이던 방은진 감독이 집행위원장을 맡고,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과 임권택ㆍ정지영ㆍ이준익ㆍ김용화 감독, 배우 안성기ㆍ권해효 등이 자문위원, 조직위원, 집행위원으로 힘을 보탰다.
그렇게 1년여간 준비해 온 평창영화제가 드디어 첫 걸음을 뗀다. 다음달 16일부터 20일까지 강원 평창군과 강릉시 일대에서 평화와 분단, 전쟁, 난민 등을 주제로 다룬 33개국 영화 85편(장편 51편ㆍ단편34편)이 관객을 만난다. 개막작은 1992년 제작된 북한 영화 ‘새’다. 한국전쟁 때 헤어져 남과 북에서 각각 조류학자로 활동하던 원홍구ㆍ원병오 박사 부자가 조류 연구를 위해 날려보낸 새로 인해 서로 생사를 확인하게 된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다. 북한 영화가 규제 없이 상영되는 건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이후 두 번째다.
문 이사장은 “남북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문화 예술”이라고 강조하며 독일 사례를 들었다. “‘트라비에게 갈채를’(1991)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독일 통일 이후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떠난 동독 가족이 겪는 문화 충돌을 그린 코미디예요. 이 영화가 동독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동독 사람들이 회사 면접을 볼 때 ‘당신은 무엇을 잘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내가 상품이냐’면서 그렇게 화를 냈다고 하더군요. 사고 구조가 다른 데서 비롯된 오해와 충돌인 거죠. 그런 지점에서 영화가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평창영화제의 최종 목표는 북측 강원 원산과 분산 개최다. 문 이사장은 충무로 영화인들의 염원인 북한 로케이션 촬영과 개성공단 내 세트장 건설, 궁극적으로 남북 공동 제작까지 꿈꾸고 있다. 그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 산하 남북영화교류특별위원회는 남북이 어떤 형태로든 영화 한 편을 함께 완성해 보자고 북측에 구두 제안도 했다. 최근 북한은 자본 문제로 장편 극영화를 한해 1, 2편 정도밖에 못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대 흐름에 맞게 변화하라고 주문한 것도 한 가지 이유라고 한다. “고도의 교류 협력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영화제 출품과 상영 같은 쉬운 일부터 시작하자는 거죠. 평창영화제도 북측에 영화 출품과 영화인 참석, 금강산 폐막식 등을 수차례 제안했는데 성사되진 못했습니다. 또 하나, 남측에선 유실된 1950~60년대 영화 필름 중 상당수가 북측에 남아 있어요. 그 필름을 공유해 주면 디지털 복원하고 전국 순회 상영을 하겠다고 했는데 협조가 잘 안 됐어요. 그게 너무나 아쉽습니다.”
문 이사장은 “이제는 북측이 전향적으로 나와 줘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북핵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ㆍ외교 사안이지만, 남북ㆍ북미 관계가 교착 국면에 빠질 때 꾸준한 문화 교류가 압박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진단이다. “북한은 정치적 교류가 막히면 다른 분야 교류까지 끊어요. 대단히 잘못하는 일이죠. 문화 예술과 스포츠 분야 교류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으면서 파급효과가 큽니다. 오히려 북측이 이 점을 적극 활용해야 해요.”
문 이사장은 최근 한국을 상대로 무역 보복 조치에 나선 일본 아베 정부도 따갑게 비판했다. 그는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면 일본도 북일 관계 정상화에 나서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남한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라며 “한일 갈등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속셈 같은데 정세 변화를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아베의 단견이 매우 안타깝다”고 했다.
문 이사장의 최근 행보는 문익환 목사가 걸어간 길과 꼭 닮았다. 문화 예술계가 그에게 요청했고, 그 자신도 문 목사의 유업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에게 천직은 배우다. 2000년 즈음 노사모 활동과 2002년 16대 대선 선거운동,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민주통합당 활동 등 정치에 참여하고 있던 때에도 마음속에선 연기를 벗어나지 않았다. “돌아보면 참 여러 일을 하며 살았어요. 문 목사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급적 정치엔 발 담그지 않으려 했는데 2000년 스크린 쿼터 축소 반대 운동 이후 삶이 달라졌죠. 정상 사회를 위한 시민의 책무였다고 할까요. 이제 정치는 안 할 생각입니다(웃음).”
최근 그는 배우로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상반기에 tvN 드라마 ‘남자친구’와 ‘자백’을 끝냈고, 지난해 JTBC ‘라이프’에도 출연했다. 영화 ‘1987’(2017)의 안기부장 역, ‘부러진 화살’(2012)의 냉혈 판사 역 등 실제 자신과는 정반대인 ‘불의의 화신’을 살벌하게 연기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문 이사장은 “내가 저들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하반기에는 사전 제작을 마친 SBS 드라마 ‘배가본드’가 방영되고, 강이관 감독의 새 영화 촬영도 시작한다. 역시 배우는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가장 자유로워지는 법이다. 그는 “한동안 무언가에 짓눌린 듯이 지냈는데 요즘엔 정말 편안하다”며 “이렇게 마음 편해도 되나 싶을 정도”라고 웃음 지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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