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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30일 제프리 엡스타인(왼쪽 두 번째)이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법원에서 두 건의 매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당시에도 그는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가 포착됐지만 연방검사와의 석연찮은 플리바게닝을 거쳐 이 부분은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혐의인 매춘 행위 두 건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해 결국 징역 13개월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주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 제프리 엡스타인(66)의 ‘미성년자 상습 성매매’ 사건은 묘한 기시감이 들게 한다. 특권층의 추악한 성범죄, 석연찮은 불기소,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재수사. 한국을 들끓게 한 ‘김학의 사건’, ‘장자연 사건’과 엇비슷한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물론 이들 사건의 구체적 내용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또 엡스타인은 11년 전 형사처벌을 면했던 바로 그 혐의로 지난 8일(현지시간) 결국 기소됐다는 점에서 최종 결말도 김학의ㆍ장자연 사건과는 다를 것이다. 그러니 이 기시감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애당초 법의 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됐다고 말하는 게 보다 정확하다. 각 사건 스토리의 중반부에 있는 ‘봐주기(또는 부실) 수사’가 공통 분모라는 얘기다. 돈과 힘이 있는 자는 ‘법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반대로 ‘법을 주무르고 지배한다’는 건 한국이든 미국이든 마찬가지다.

따라서 2008년 미국에서 벌어진 부당거래를 들여다 보는 건 여러모로 참고가 될 법하다. 엡스타인 사건 전말을 추적한 일간지 마이애미헤럴드의 탐사보도 시리즈 ‘정의의 왜곡(Perversion of Justice)’은 그 결정적 장면을 생생히 그려냈다. 지난해 11월 28일 출고된 첫 기사의 도입부는 이렇다. “2017년 10월의 어느 날 아침, 마이애미 연방검사인 알렉산더 어코스타는 (엡스타인의 변호인인) 전 직장 동료 제이 레프코비츠와 조찬 약속을 했다. (중략) 그들은 검찰청 대신 매리어트 웨스트팜비치 호텔에서 만났다. (중략) 엡스타인은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 엡스타인의 모든 범죄와 수많은 사람들의 연루 사실을 은폐하는 기이한 감형 협상이 체결됐다.”

검사가 피의자 측과 바깥에서 따로 만난 것부터 부적절한데, 이른바 ‘불기소 합의’로 불리는 이 거래에선 그야말로 악취가 진동한다. 엡스타인은 ‘매춘부 성행위 두 건’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종신형 선고까지 가능한 미성년자 성범죄 혐의는 연방기소를 피했다. 특히 협상에는 ‘엡스타인의 범죄에 가담한 잠재적인 불특정 공범들에게도 면책권을 부여한다’는 이례적인 내용도 포함됐다. 게다가 어코스타는 연방법에 반하는데도 ‘협상 사실을 피해자 측에 비밀로 한다’는 약속까지 했다. 검사가 협상안을 제시한 게 아니라, 거꾸로 엡스타인 측 요구를 전부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 결과, 엡스타인이 치른 죗값은 징역 13개월이 고작이었다. 심지어 수감 기간 중 그는 일주일 중 6일을, 하루 12시간씩 ‘외출’을 나가 개인 사무실에서 지냈다. 이쯤 되면 처벌이 아니라 ‘소나기나 일단 피하라’면서 면죄부를 제공한 것이다.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는 “엡스타인은 부패한 금권정치의 궁극적인 상징”이라고 했다.

이제 미국 사회는 “누가 제프리 엡스타인을 보호했나”(9일 자 NYT 사설)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하고 있다. 문제의 협상을 한 그때 그 연방검사,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노동장관에 오른 어코스타는 얼마 전 사임했다. 하지만 그가 보호막을 펼친 유일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현지 언론은 일단 트럼프 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영국 앤드루 왕자,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등과 친분을 맺은 엡스타인의 화려한 인맥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우리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검찰의 김학의 사건 재수사는 지난 5월 반쪽짜리로 끝났고,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6월 장자연 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아예 수사 권고조차 하지 못했다. 두 사건 모두 과거의 봐주기 수사 의혹은 그대로 남았고, 범죄자 비호를 위해 사건을 왜곡한 세력의 실체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정답을 찾기란 요원해 보인다. 그래도 25일 출항하는 윤석열호(號) 검찰이 ‘지연된 정의’라도 실현하고자 어떤 노력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김정우 국제부 차장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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