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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칼럼] ‘생큐 아베’ 경고, 허세 안 돼야

입력
2019.07.18 18:00
수정
2019.07.18 18:2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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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습’에 놀란 文정부 대책 허둥지둥

외교해법 외면한 日보복, ‘경제 침략’ 인식

“대일의존 줄여야 역사ㆍ경제 주도” 판단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 앞서 일본을 향해 경제보복 조치 철회와 외교적 해결를 요구하는 강온 양면의 메시지를 내놓은 후 굳은 표정으로 회의 준비를 하고 있다. 류효진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 앞서 일본을 향해 경제보복 조치 철회와 외교적 해결를 요구하는 강온 양면의 메시지를 내놓은 후 굳은 표정으로 회의 준비를 하고 있다. 류효진 기자

아베 일본 정부의 ‘경제 공습’은 충격과 전후 맥락에서 20여년 전 IMF 외환 위기를 연상케 한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 가입에 집착해 금융 개방을 서두르며 원고(高)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에 편승한 금융기관은 단기 돈놀이에 눈이 멀었고, 대기업은 ‘대마불사’ 신화에 따른 확장일로 차입 경영의 단맛에 빠져 도낏자루 썩는 줄 몰랐다. 1997년 1월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삼미 진로 기아 등 대마가 잇달아 무너지고, 일본계 자금 철수로 촉발된 신용경색 경보음이 시장을 휘저었다. 그러나 정부는 ‘펀더멘털 타령’만 되풀이하다 그해 말 나라와 국민을 길거리에 내동댕이쳤다.

그즈음 ‘위장된 축복(disguised blessing)’이란 말이 나돌았다. 한국의 명줄을 쥔 IMF 총재 캉드쉬가 “고금리 긴축정책과 금융ㆍ기업 구조조정 등의 고강도 처방이 당장은 가혹하게 느껴질지라도 길게 보면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이끄는 축복이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실제로 수많은 국민의 눈물과 한숨을 밑거름으로 한국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을 이식하며 단기간에 위기를 이겨냈다. 수익과 안정성에 기반한 경영이 자리 잡았고 금융 건전성과 외환 쌓기 생존 방식이 됐다. 위기가 개인에겐 저주였으나 국가엔 축복이었던 셈이다.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게 있다. 1930년대 미국 보험사에 근무하던 H. W. 하인리히라는 사람이 산업재해 사례 분석을 통해 발견한 통계적 법칙으로, ‘1:29:300의 법칙’으로 불린다. 큰 사고는 어느 날 돌연 덮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일정 기간에 일어난 크고 작은 수많은 사고와 경고성 징후를 방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산업재해 현장에서 포착된 이 법칙은 각종 사건ㆍ사고를 넘어 정치ㆍ사회ㆍ경제적 위기를 분석하는 도구로도 유용하다. 실제 이 법칙은 외환위기의 원인과 정부 책임을 따질 때 종종 인용됐으며, 지금도 정치 지도자나 기업인의 위기관리 덕목을 논하는 기준으로 활용된다.

총성 없는 전쟁 수준으로 치닫는 작금의 한일 갈등과 불화를 보며 이 법칙을 떠올리는 것은 한가한 일인지 모르겠다. 일본이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 정치ㆍ외교적 사안에 보편적 자유무역의 가치를 부정하는 경제적 보복 카드를 내밀고 점점 강도를 높여가는 현실에서 문제의 원인과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자칫 우리의 전열을 흐트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본의 일부 진보 식자들마저 “(한국과의) 융화를 서두르기보다 차제에 불신을 명확하게 전달해 양국관계를 새롭게 하는 첫걸음이 된다면 수출 규제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거드는 상황이니, 일본의 대대적 공세는 우리만의 진실이나 정의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금주 초 강온 양면의 메시지를 띄운 것은 고심의 산물로 보인다. 일본의 보복 조치가 역사문제 차원을 넘어 한일 분업구조에 기초한 한국의 핵심 경쟁력을 겨냥한 불순한 경제침략인 만큼, 우리도 대일 기술 의존의 고리를 끊는 자구책을 강구할 것이며 결국 일본경제에 더 큰 피해가 돌아갈 것이라는 경고는 이례적이다. 반면 “우리가 제시한 방안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한 바 없다”며 외교적 해결의 장도 열어놓았다. 전 국민이 똘똘 뭉쳐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경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저력을 되살려 ‘위장된 축복’의 ‘생큐 아베’ 버전을 만들겠다는 결기를 보이며 외교적 해결을 촉구한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이 나온 이후 8개월 동안 일본의 반발과 협의 요청을 번번이 무시하며 보복 경고도 흘려들었다. 숱한 징후를 보고 큰 타격을 예상하면서도 적폐 청산 잣대로 판결을 해석하며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문 대통령의 ‘생큐 아베’ 경고는 어쩐지 멋쩍다.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감내해야 할 땀과 고통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으니 말이다.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외교적 무례와 도발을 보란 듯이 일삼는 일본의 총포 앞에서 맨 주먹 ‘죽창가’가 웬 말인가.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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