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지식인 공동성명에서 이태진 서울대 교수(사진왼쪽)가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지식인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1910년 체결된 한일병합 조약은 무효'란 내용의 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 배우한기자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해군의 자존심으로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됐다 침몰한 야마토 전함의 출격 이유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야마토 출동은 무모하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자료가 충분했는데도 왜 해군 엘리트 집단이 출격 명령을 내렸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세계 최대 거함이지만 대공사격이 취약한 야마토는 미군 전투기의 집중 포화에 맥없이 침몰했다. 최고책임자인 연합함대사령관은 전쟁 후 비판이 쏟아지자 “당시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일본 작가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이를 ‘공기(空氣ㆍ구키)’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공기의 연구’)

□ 일본인은 논리나 사상을 초월한 주위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는데, 그것이 바로 ‘공기’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저항하는 사람을 이단시하고 ‘공기 거역죄’로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정도의 힘을 가진 초능력”이다. 일상사는 논리적 기준에 따라 판단하지만 결단의 순간에는 ‘공기의 지배’를 받는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개시, 일중 국교 정상화 등도 그런 예다. 문제는 ‘공기’에 의해 현실과 동떨어진 결정을 내려 나라의 운명을 그르쳤을 때, 그 책임의 모호성이다.

□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 조치의 배경과 주체가 명확하지 않지만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것도 ‘공기’의 영향으로 보인다. 일본의 여론조사를 보면 한국에 대한 규제 강화 조치에 찬성률이 절반을 훌쩍 넘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한국에 대한 반감이 확산됐다고 해도 반대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일반 국민이야 그렇다 쳐도 지식인과 시민단체까지 자유무역주의 원칙에 위배되고 국제사회 규범에 어긋나는 경제보복에 둔감한 것은 실망스럽다.

□ 교수와 역사학자, 작가, 변호사, 언론인 등 일본 지식인 520명은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은 2010년 병합조약이 불의ᆞ부당했으며 당초부터 원천무효라고 선언한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서명 참여는 진정한 양심의 발로로서, 한국 측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공기’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쇼와(昭和) 군국주의 이전 메이지 초기 지도자들은 “그래도 남자라는 놈이 ‘공기’에 지배당해 경거망동하다니…”라며 공기에 속박되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고 한다. 민족주의적 이해를 뛰어넘어 양 국민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애쓰는 일본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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