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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 검찰총장의 임기가 끝나간다. 문재인 정부 첫 검찰 수장인 그는 과연 어떤 검찰총장으로 기억 또는 기록될까?
어떤 이는 임기 중 다섯 번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던 그를 ‘사과의 아이콘’으로 기억할 것이다. 혹자는 수사권 조정안을 이유로 임명권자에게 반기를 든 ‘불충’을 떠올릴 지 모른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만나 그들이 겪은 고초를 듣던 중 눈물을 흘린 인간 문무일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본 사람도 있다.
사과와 눈물과 반항. 관련 없어 보이는 이 여러 모습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민주주의’다. 검찰 과오를 사죄할 때, 수사권 조정안을 조목조목 따질 때,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비상상고권을 행사하면서, 문 총장은 모두 ‘민주주의’를 사죄와 반성, 그리고 반론의 근거로 앞세웠다.
문 총장은, 검찰 총수로선 매우 특이하게, 발언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즐겨 썼다. 민주주의 국가 검찰총장이 민주주의를 강조한 게 뭐 특별한 일인가 하겠지만, 역대 검찰총장들의 발언들을 돌이켜 보면, 이 조직의 수장이 아무 수식어가 붙지 않은 ‘민주주의’를 말한 것은 정말 이례적이다.
과거 검찰총장들은 언제나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선거를 앞두고서나 대형 집회가 예고된 상태에서, 검찰총장들이 전국 검사장이나 공안부장을 집합시켜 강조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항상 ‘자유민주주의’였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는 부패척결, 민생침해 세력 엄단 등과 함께 항상 검찰 본연의 임무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대대로 검찰이 사랑했던 자유민주주의가 실제 집행된 모습은 어땠을까? 검찰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합쳐진 사전적 의미와 거리가 멀었고, 헌법 전문과 4조에 제시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도 차이가 컸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검찰식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기보단, 특정 집단에 따라 이익과 불이익을 달리 부여하는 대한민국 검찰 특유의 이중 잣대의 뿌리가 된 철학이었다. 노동법 사건에서 근로자를, 집시법에서 진보단체를, 선거법에선 야당을, 형법에선 힘없는 자들에게 더 서슬 퍼런 압박이 가해졌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에겐 관대했다. 검찰의 자유민주주의는 원래 취지와 달리 ‘기울어진 운동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기득권에 복무했다.
문 총장이 아무 수식어 없는 ‘민주주의’를 강조한 것은 그래서 신선했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임명권자 성향에 맞추려는 립서비스였다는 분석도 가능하겠지만, 그 임명권자 뜻을 거스르며 내세웠던 명분 또한 민주주의(“경찰권 강화는 민주주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였다는 점을 볼 때 자리를 보존하려는 수단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문 총장을 기억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그가 말로써 그렇게 강조한 민주주의를 검찰 조직에 제대로 구현했는지에 대한 평가도 엇갈릴 것이다. 다만 서울중앙지검 공안부가 대기업의 노조탄압 사건을 수사하고, 검찰 수뇌부를 공개 저격한 일선 검사들이 이를 이유로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을 정도로 검찰은 달라졌다. 지금 검찰 조직은 적어도 과거 외눈박이 자유민주주의 시대를 접고 진짜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와 다른 길을 갈 채비를 갖춘 검찰은 이제 윤석열 시대를 맞게 된다. 신임 총장에게 국민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바로 검찰개혁이지만, 아직 윤 신임 총장은 검찰을 어떻게 개혁할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 청사진의 시작은 민주주의여야 할 것이다. 이제는 우리 검찰도 ‘진짜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조직, 밖으로 보편적 민주주의 가치에 도전하는 세력을 엄단하면서, 안으론 1인 리더십이 아닌 민주적 절차에 따라 작동하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치우침 없는 진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지향하는 것이 바로 달라진 시대의 검찰총장에게 주어진 책무다.
이영창 사회부 차장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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