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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향성을 우대하는 사회에서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십중팔구 손해를 본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속설은 내향적인 사람들을 절망시킨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분위기 망치지 마’,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성격을 원망하기 쉽다. 나는 본질적으로 내성적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외향적인 성격을 연기할 때가 있다. 대중앞에서 강연하는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나를 ‘의외로 외향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가족들은 내 본질적인 내향성을 잘 안다. 나는 내성적인 본성을 숨기지 않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그렇게 솔직한 내 모습을 표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뜻밖의 외향성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완전히 외향적인 사람도 완전히 내향적인 사람도 없다. 내향성과 외향성은 지킬과 하이드처럼 한 인격 내부의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아닐까.

나의 ‘내성적인 성격의 역사’에는 크게 세 가지 국면이 있었다. 첫 번째 시기는 ‘내성적인 내 성격을 부끄러워한 시절’이었다. 30대 중반까지 쭉 내성적인 성격을 저주하며 살았으니 그 시간이 너무 길었던 셈이다. 내향성과 예민함과 우울함이 무려 3박자를 이루었으니, ‘내 성격은 참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을 통과하고 나니, 그런 감정은 지나치게 가혹한 자기규정이었음을 알겠다. 내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배낭여행을 하고, 강의를 하고, 바쁘게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내향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기에.

두 번째 시기는 ‘내성적인 성격의 장점을 발견하며 기뻐한 시절’이었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내향성의 장점을 알게 되었다.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외부의 자극 없이도 혼자만의 세계를 가꿀 줄 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온전히 집중하며 나만의 세계를 창조하느라 여념이 없기에 언뜻 괴짜로 보이지만, 실은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생산해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내가 글쓰기를 업으로 택한 것도 내향성을 창조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무의식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말하기가 두려워 글쓰기로 도망쳤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바로 그 글쓰기 때문에 더 많은 강연과 인터뷰를 소화해야만 하는 딜레마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 번째 시기는 ‘내향성과 외향성의 이분법적인 경계를 뛰어넘기 위해 애쓰는 지금’이다. 내 안에 잠재된 90%의 내향성과 10%의 외향성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다. 내향적인 사람들의 침묵은 수많은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 같은 침묵이라도 아주 다채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침묵의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할 때가 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대세나 시류에 대한 반대나 저항의 의미로 침묵을 택하기도 하고, 너무 행복하거나 충만한 느낌을 조용히 음미하기 위해 침묵하기도 한다. 침묵하는 이들은 겉으로 똑같이 내성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때그때 다 다른 빛깔과 향기를 머금은 침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침묵에도 수백가지 스펙트럼이 있는 셈이다. 이제 나는 내 안의 우울한 내향성을 편애하지도 않고, 뼛속 깊이 활달하고 적극적인 타인의 외향성을 질투하지도 않으려 애쓴다. 내 안에도 두 가지 본성이 모두 꿈틀거리고 있음을 이해한다.

내향성도 외향성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좀 더 관대했으면, 내성적인 사람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내향적이라고 해서 주체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외향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더 밝고 긍정적인 것도 아니기에. 예컨대 글쓰기는 내향성의 집중력과 외향성의 표현력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일이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내 안의 내향성과 외향성을 최대한 실험해보는 마음챙김 훈련을 한다. ‘나는 내성적이니까 이런 일은 못해!’라는 갑갑한 자기규정의 감옥을 뛰어넘고 싶다. 나는 내 안의 내향성과 외향성의 경계를 뛰어넘어,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용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진정한 내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간직하고 싶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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