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강력한 위계질서 속에 도제식 교육시스템 ‘폐쇄적 문화’ 
 “용기 내서 피해 사실 알려도 신고자가 퇴출당하는 게 현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2016년 지방의 한 대학병원에서 정형외과 레지던트로 근무했던 A(36)씨는 레지던트 생활 1년 만에 병원생활을 접었다. 1년간 지속된 레지던트 동기와 선배, 정형외과 임상교수(전문의)의 폭언과 폭행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A씨는 사직 후 대한병원협회 전공의 폭력신고센터에 이를 신고했지만 폭언을 일삼은 선배 레지던트는 1개월 정직 뒤 다시 병원에 돌아왔다. 동기와 임상교수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병원에서 어떤 징계도 받지 않았다. 피해자만 의료계를 떠난 것이다.

대형 병원은 간호사들의 ‘태움’(영혼이 불에 타 재가 될 때까지 괴롭힌다는 뜻에서 유래)이나 전공의에 대한 폭행 등이 만연해 전부터 직장 내 괴롭힘이 심각한 문제로 지적돼 왔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나 모욕 등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개정 근로기준법(‘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지난 16일부터 시행에 들어갔지만, 대형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와 전공의들은 법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법에 따르면 누구든지 상사의 부당한 지시나 모욕 등 ‘갑질’을 회사에 신고할 수 있고, 신고자에게 불이익을 줄 경우 처벌하도록 했다. 하지만 강력한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소수 의료인들끼리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병원의 폐쇄적인 문화 때문에 피해자가 감히 신고할 용기를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삽화=김경진 기자

서울의 한 대학병원 간호사 B(32)씨는 18일 “간호사 사회는 ‘군대보다 위계질서가 강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라면서 “후배가 선배 간호사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신고하려면 간호사직을 걸어야 할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있는 C(35)씨는 “욕을 먹는 것은 일상이고, 시술ㆍ수술 도중 폭력이 가해져도 ‘보다 나은 의사를 만들기 위해 훈계한 것’으로 미화되는 게 현실”이라며 “감히 선배의사나 교수를 가해자로 신고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용기를 내 상사의 부당함을 신고해도 병원에서 가해자들에 의한 2차 피해가 발생하기 일쑤다. 이승우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은 “가해자가 ‘훈계를 했는데 나를 천하의 나쁜 놈으로 신고를 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 신고한 전공의는 퇴출 당하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의사 사회는 워낙 ‘제 식구 감싸기’가 심해, 설사 병원에서 징계를 해도 수위가 높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16일은 폭행 피해를 입은 전공의를 보호하는 내용의 개정 전공의법도 동시에 시행됐다. 전공의들은 이 법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는 입장이지만 교수들의 생각은 다르다. 수도권의 모 대학병원 교수는 “폭행이나 폭언은 분명 사라져야 하지만 이렇게 법으로 강제하면 교수들은 전공의 교육을 등한시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대학병원 등 의료기관들은 법 시행에 맞춰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대응절차와 예방조치 등 규정을 만들고, 직원 대상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의 한 대형병원 인사 관계자는 “‘괴롭힘’에 대한 판정기준이 모호해 실제 신고가 들어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의료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려면 인력충원 등 근본적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태엽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장은 “병원에서 폭행이나 폭언이 난무하는 것은 결국 과도한 업무량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법만으로는 태움 등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승우 회장은 “교수들 사이에 ‘간호사는 노조가 있으니 때리지 말고 전공의만 때려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공의 현실이 비참하다”며 “법 시행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보고 지역별, 병원별로 전공의 노조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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