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등 올해만 7편… 지상파ㆍ케이블채널 경쟁적 편성
넷플릭스 등 OTT 영향 받아 대세로… 지나친 ‘쪼개기’ 방송 흐름 깨 우려도
“아악!”. 2016년 5월 경기지방경찰청 112종합상황실. 전화기 너머 비명이 순식간에 상황실을 휘감았다. 범죄 신고를 한 피해자의 목소리였다. 신고는 ‘코드 제로’로 접수됐다. 납치나 살인 등에 해당하는 강력 사건이었다. 잠시 후 비명이 섞인,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뭐라고요? 신고자분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여보세요?” 경찰은 신고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전화라 상황 파악을 위해 묻고 또 물었다.
◇핏방울, 목소리… ‘보이스 프로파일러’의 탄생
“직접 가보니 더 충격이더라고요.” 마진원 작가는 애초 112종합상황실을 소재로 드라마를 쓰려다 현장을 방문한 뒤 기획 방향을 살짝 틀었다. “소리가 주는 공포가 있더라고요. 이곳에선 현실의 공포였죠.” 마 작가는 소리를 주 소재로 한 범죄 수사물 극본을 쓰기 시작했다. 소리로 범인을 특정하는 ‘보이스 프로파일러’란 직군도 새로 만들었다. 그는 드라마의 줄거리를 담은 시놉시스에 ‘목소리’(원제)란 제목을 달고 그 밑에 핏방울을 그려 넣었다. 최근 한국일보와 만난 마 작가가 들려준, 케이블채널 OCN의 시즌제 드라마 ‘보이스’의 탄생 과정이다. 지난달 시즌3가 끝나면서 안방극장에서 잔잔한 반향을 낳은 ‘보이스’는 해외에서도 주목 받았다. 일본 지상파 방송사인 니혼TV는 ‘보이스’를 리메이크해 지난 13일 첫 방송을 내보냈다.
◇콘텐츠 소비 주기 빨라진 변화
7개. 지난 1월부터 올 연말까지 방송된 시즌제 드라마 편수다. 지난 1월 ‘신의 퀴즈: 리부트’와 ‘동네변호사 조들호2: 죄와 벌’을 시작으로,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17’ ‘보이스 시즌3’ ‘구해줘 시즌2’ ‘검법남녀 시즌2’가 줄줄이 방송됐다. SBS는 11월 방송을 목표로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2’를 준비 중이다.
요즘 안방극장엔 시즌제 드라마가 ‘대세’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극소수에 불과했던 시즌제 드라마 제작은 부쩍 활발해졌다. 주로 수사물이 시즌제 드라마 소재로 각광 받는다. 수사란 뼈대를 정해놓고 사건과 악역을 바꿔 회마다 새로운 에피소드를 보여주면서도 이야기를 오래 끌고 가기 쉬워서다. 대부분 시즌제로 제작되는 ‘미드’(미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시청자들이 늘면서 국내 시즌제 드라마의 유행은 빠르게 바람을 탔다. 시청자의 콘텐츠 소비 주기가 짧아진 영향도 컸다. 드라마평론가인 박진규 소설가는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Over The Topㆍ인터넷 동영상 서비스)의 영향력이 커진 결과”라고 봤다. 김은희 작가의 ‘킹덤’ 등 OTT에 유통되는 콘텐츠 대부분은 시즌제다. 시청자의 콘텐츠 소비 습관 및 콘텐츠 환경 변화가 국내 드라마 제작 풍토를 시즌제로 확 바꾸고 있다. 시즌제 열풍은 예능에도 거세다. ‘대화의 희열’(KBS)을 비롯해 ‘삼시세끼’ ‘신서유기’(CJ ENM), ‘비긴어게인’(JTBC) 등 채널을 가리지 않고 시즌제 예능이 방송가에 쏟아졌다.
◇마블처럼 세계관… 몰린 마니아들
국내 방송가에서 시즌제 드라마는 홀대받았다. KBSㆍMBCㆍSBS 등 지상파 방송사는 수사물에선 굵직한 대서사를 선호해 시즌제 드라마를 외면했다. 2000년대 초반 ‘안녕, 프란체스카’ 등 예능 형식의 시트콤 장르에서만 시즌제로 제작됐다. 시즌제 드라마를 선호했던 곳은 케이블 채널이었다. ‘큰’ 작품들이 지상파로 쏠려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대안이었다. ‘보이스’와 ‘구해줘’ 시리즈 제작을 총괄하는 이찬호 스튜디오드래곤 책임프로듀서(CP)도 “시즌제 드라마 제작은 브랜드를 만들어 어떻게든 시청자들에 관심을 받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말했다. 2007년 tvN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1’이 시작이었다.
최근 1~2년 사이 상황은 180도 변했다. 시즌제 드라마에 마니아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미국 할리우드 마블스튜디오처럼 시리즈 드라마에 세계관이 구축되면서다. ‘보이스’는 극중 인물을 다양화하고 공간(시즌1 한국, 시즌3 일본)을 넓혀가며 ‘혐오와 차별의 공포’란 세계관을 쌓아왔다. 시즌을 거듭하면 캐릭터와 이야기에 살이 붙기 마련. 2007년부터 올해까지 12년 동안 ‘막돼먹은 영애씨’에 출연중인 김현숙은 본보에 “인물을 세세하게 표현할 수 있고 뒷얘기로 배역을 입체감 있게 보여줄 수 있어” 이 드라마를 쉬 놓지 못한다고 밝혔다. ‘구해줘’ 시리즈를 제작한 드라마 제작사 히든시퀀스의 이재문 대표는 “‘구해줘’가 시즌제로 제작돼 종교의 광기와 일상적 풍경을 모두 보여줄 수 있었고 종교란 소재에 생명력을 더할 수 있었다”고 의미를 뒀다.
◇”틀 갇혀” 배우 섭외 어려움도
시즌제 드라마가 만들어지기까지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보이스’ 작가는 극에 나오는 범죄자 프로필까지 소품팀에 맡기지 않고 직접 챙긴다. 이야기의 연속성에 맞춰 캐릭터의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서다. 연속해서 동일 배우를 섭외하기가 가장 큰 숙제다. 10여 명의 배우가 속한 한 연예기획사의 고위 관계자는 “시즌제를 위해 일정을 비워둬야 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자칫 한 캐릭터에 갇히다 보면 틀을 깨기 쉽지 않아 유명 배우들은 시즌제 드라마 출연을 결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시즌제가 유행으로 번지면서 ‘유사 시즌제 드라마’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시즌제를 표방하며 드라마를 지나치게 쪼개기 편성해 방송의 흐름을 해친다는 지적이다. 종합편성(종편)채널 JTBC는 ‘보좌관’을 10회씩 나눠 시즌1을 6~7월, 시즌2를 11~12월 각각 내보낸다. 20년 넘게 콘텐츠 기획을 해 온 외주 제작사 관계자는 “요즘엔 예능도 20회 넘는 기획안을 찾아보기 어렵다”며 “드라마와 예능의 시즌제 제작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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