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직원들 “갑질 근절 기대” 환영… 상사들은 “기준 모호” 우려도
게티이미지뱅크

#대기업 간부인 정모(52)씨는 16일 출근길 내내 카카오톡 대화방을 보는 데 정신을 쏟았다. 한 친구가 “오늘부터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된다는데 몸 조심하자”고 운을 뗀 것이 시작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냐”는 물음이 곧 이어졌고, “평소에 하는 것처럼 하면 100% 걸린다”는 답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인사고과만 잘못 줘도 ‘갑(甲)질’이라고 할 텐데, 어떻게 일을 하라는 거냐”는 하소연까지, 40분 넘게 카톡방 대화는 계속됐다. 정씨는 “대다수는 같이 잘 해보자는 마음에서 조금 과하게 말을 하는 걸 텐데,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기업 사보팀에서 근무하는 A씨는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편집을 담당하는 선배에게서 그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모욕감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이틀 전만 해도 그랬다. 사보 원고 내용을 수정하기 위해 그 선배 자리로 갔는데, 선배는 갑자기 휴대폰을 들고 “너, 숙제는 했어?”라며 자녀와 통화를 시작했다. 오랜 시간 통화를 끝낸 뒤 기다렸던 A씨가 수정을 요청하자 난데 없이 “도대체 왜!”라면서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A씨는 “사무실 전 직원들이 쳐다보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직장 내 괴롭힘 판단 어떤 기준으로. 그래픽=송정근 기자

직장 내 일상적인 갑질 행위를 뿌리뽑기 위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16일, 각자의 일터로 출근한 직장인들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간부들 사이에서는 별 생각 없이 했던 말이나 행동이 처벌 받을 만한 것들이었는지를 궁금해 하는 얼굴이 상당수인 반면, 대부분의 젊은 평직원들은 올바른 직장 문화가 마침내 정착될 것이라며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떤 게 갑질인지 모호하기만 하다는 걱정과 불만을 섞은 표정도 적지 않았다.

일반 직원들은 대부분 법 시행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매주 회의 시간만 되면 지옥 문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는 한 대기업 계열사 직원 B씨는 부장이 자신을 겨냥해 “00 출신이라 잘 모르나 본데”라며 토를 달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경력으로 입사한 데다 업무와 연관 있는 마케팅 분야를 전공한 게 아니라서 말끝마다 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얼마나 큰 모욕감을 받았는지를 부장이 아는지 모르겠다”며 “이번 주 회의 때는 어떨지 지켜볼 작정”이라고 말했다.

상사의 괴롭힘에 생리불순까지 겪었다는 광고회사 직원 C씨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는 “사무실이 아닌 복도나 화장실에서 째려보거나 툭하면 ‘똑바로 하세요’라며 괴롭히는 여자 상사가 있다”며 “미혼인데 생리불순으로 병원까지 가야 했다. 법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해방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기대했다.

반면 평소 직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상사들 표정에는 근심이 역력했다. 언행을 조심하자는 말을 서로 주고 받거나 법에 대한 궁금증을 묻고 답하는 일이 잦아졌다. 한 대기업 간부는 “예의를 갖추자는 취지에는 당연히 동의하지만, 결국 서로 눈치만 보다 일을 제대로 지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한 패션업체 부장은 “대외 행사에 일반 직원이 아닌 중간급 간부들이 투입됐다”며 “윗선이 직원들 눈치를 보는 게 아니겠느냐”고 귀띔했다. “악의적인 진정과 문제 제기가 쏟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사무실에서 가볍게 하던 농담이나 사적인 대화 자체가 줄어들면서 법 시행 첫 날인 오늘 하루 ‘쥐 죽은 듯 조용한 분위기’도 감지됐다. 혼란이나 다툼을 만들지 않으려고 구성원 간 관계가 폐쇄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괴롭힘 범위에 대한 모호성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한 유통업체 부장은 “적용 범위가 명확해질 때까지는 사무실 내에서 아예 말수를 줄이고, 특히 과장급 이하 젊은 직원들과는 대화를 최소화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는 심드렁한 반응도 있었다. 특히 젊은 층이 많이 일하는 정보기술(IT) 업계 분위기가 대표적이다. 대체로 자유롭고 수평적인 문화가 조성되면서 이미 폭언 등의 갑질이 비정상 행위로 취급 받던 터라, 위계가 경직된 다른 기업들보다 법 시행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한 IT 기업 과장은 “‘법으로 정하니까 더 헷갈린다’ 등 법제화에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직원들도 있다”고 했다.

‘연공서열‘ 문화가 뚜렷한 삼성전자와 LG전자, 롯데그룹 등 대기업들은 법 시행에 앞서 관련 내용을 취업규칙 등 사규에 반영했다. 사안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조사나 처벌 절차를 마련해 교육해온 만큼 큰 혼란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자체적으로 조직 문화 개선 활동을 지속해왔다”면서도 “어떤 행동이 직장 내 괴롭힘인지 명확한 정의에 대한 교육은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산그룹 관계자 역시 “예고된 시행이라 크게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란 분위기”라고 전했다.

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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