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연구가로 변신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마음껏 활동할 환경 조성하고 불필요한 규제 대폭 정비해야”
“공직자 생활은 살얼음 걷는 듯… 자유 만끽하며 공부해 행복”
금융권과 관가에서 김석동(66) 전 금융위원장은 ‘해결사’ ‘대책반장’ ‘구원투수’와 같은 별명으로 통한다. 행정고시(23회)에 합격해 1980년 공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30여 년을 경제관료로 살면서 국가 거시경제ㆍ금융 정책을 이끌었다.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과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1999년 대우그룹 해체, 2003년 카드 대란, 2011년 저축은행 부도 사태 등 국가적 현안이 생길 때마다 그의 손을 거쳐 해결책이 나왔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가 언제부터인가 주변에 “은퇴 후 역사가로 살겠노라”라고 공언하자 다들 의아해 했다. 재정경제부 차관(2007~2008년)과 금융위원장(2011~2013년)까지 지낸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인생 2막 치곤 좀 뜬금없어 보인 것도 사실이다. 화려한 이력을 발판 삼아 더 높은 자리를 꿈꾸거나 물질적 풍요를 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로 그는 2015년 예순이 넘은 나이에 본격 역사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법무법인 지평이 운영하는 ‘지평인문사회연구소’의 대표를 맡으면서다. 지난해 12월엔 고대사 영역에서 한국인의 기원을 추적한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김영사 발행)란 책도 냈다. 역사 비전공자의 연구 결과물임에도 학계에서도 이견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편이라고 한다.
◇한민족 DNA 찾으려 몽골~유럽 종횡무진
지난 12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지평인문사회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난 김 전 위원장은 족히 수백권은 돼 보이는 역사 서적 속에 파묻혀 지내고 있었다. 염색하지 않은 은발을 통해 그의 연령대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활기 넘치는 목소리와 안면 가득한 미소는 소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은퇴 후 삶을 즐기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
역사가로 변신한 계기에 대해 묻자 김 전 위원장은 “어릴 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대학에서 역사나 고고학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의 권유로 서울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으로서 재정당국에 근무하게 됐는데 주로 담당했던 분야는 거시경제 쪽이었다. 자연스레 한국의 경제 현실을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시사점을 도출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시간이 많았다.
김 전 위원장에 따르면 16세기 이래 차례로 한두 세기가량 세계를 호령했던 선진국의 성장세를 우리나라의 압축성장기와 비교하면 우리의 성장 폭이 압도적으로 컸다. 1960~2016년 세계 경제가 7.5배가량 성장하는 동안 한국 경제는 무려 40배나 팽창했는데, 이는 16~17세기의 네덜란드(5.6배), 18~19세기 영국(9.4배), 19~20세기 미국(9.5배), 20세기 일본(14.1배) 등 어디와 비교해도 월등한 실적이다.
한국이 ‘한강의 기적’이란 경탄 속에 경제규모 12위 국가(국내총생산 기준)로 도약하는 과정에 경제관료로서 일조하면서도 김 위원장은 그 기적의 원천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고 한다. 그는 “국가의 발전을 경제학적으로 접근하면 인력ㆍ기술ㆍ자본의 결합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단지 이것만으로 유달리 폭발적인 성장이 가능했던 이유를 밝히는 데 부족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분명 한국인 고유의 특성이 핵심 변수였을 거라고 보고, 이를 찾아 나선 게 역사 연구의 계기가 됐다. 단순히 유년 시절 이루지 못한 꿈을 노년에 취미 삼아 공부하는 차원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마지막 공직이었던 금융위원장 자리에서 2013년 퇴임하기 훨씬 전부터 그의 역사 연구는 시작됐다. 김 전 위원장은 2008년 재경부 차관에서 물러난 직후 ‘한민족의 DNA’를 추적하는 연구에 돌입했다. 고대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국인의 고유 특성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때부터 유라시아 대초원과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몽골 고원, 중국 북부,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 지역을 50차례에 걸쳐 직접 탐방했다. 항공편이나 숙박, 유물 구매 등에 소요된 모든 비용은 사비로 충당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가 연구에 쓰였다. 2011년 금융위원장을 맡아 2년간 봉직했던 기간을 빼면 10년 가까이 고대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셈이다.
◇”기마민족의 후예 가로막는 규제 없애야”
2,500년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추적한 결과 김 전 위원장은 한민족 DNA의 기원을 동서 8,000㎞의 유라시아 평원을 호령했던 ‘스키타이’ 등 기마민족에서 찾았다. 그리고 한민족 DNA는 네 가지 특성의 결합으로 결론지었다. 바로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역경을 극복해 온 ‘끈질긴 생존 본능’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승부사 기질’ △리더십 속에서 발현되는 ‘강한 집단의지’ △세계를 무대로 나아가서 승부를 보는 ‘개척자 근성’이다. 요소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다른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성들인데, 이 네 가지 모두를 갖춘 건 한민족이 유일하다는 게 분석 결과다. 김 전 위원장은 “네 가지를 압축하면 ‘용감하고 영리하다’는 뜻인데, 한민족의 기원인 기마민족이 기후가 열악한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맨손으로 제국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말했다.
한민족의 DNA는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는 열쇠이자 미래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방향키다. 김 전 위원장은 지금 한국이 겪고 있는 위기 상황의 원인을 두고 “한민족의 DNA가 꺼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새로운 성장동력 상실과 계층별 양극화 현상, 천문학적으로 늘어난 가계부채 규모,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년 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민족의 DNA를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김 전 위원장은 한발 나아가 “기마민족의 후손인 우리가 고유의 DNA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며 “구체적으로는 정부가 불필요한 규제를 대폭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세계 무대에서 경쟁할 때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는 게 지난 반세기 현대 경제사의 교훈인데, 지금은 법적 규제뿐만 아니라 기업에 대한 사회적ㆍ정서적 규제까지 더해져 기업의 행동 범위가 너무 좁아졌다고 지적했다. 만약 한민족의 DNA만 되살아나면 통일 한국이 캐나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을 차례대로 추월해 2040년 무렵에는 GDP 규모로 세계 6번째 국가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그는 전망했다.
◇이상적인 은퇴 후 삶은 “시대와 호흡하는 것”
공인된 ‘경제 해결사’란 인식 덕분에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김 전 위원장이 또 한 번 금융위원장을 맡을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는 “실제로 (청와대에서) 그런 논의가 있었지만, 젊고 유능한 다음 세대가 정부를 이끄는 게 맞는 것 같아 역사가로 남기로 했다”고 회상했다. “앞으로도 공직에 몸 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역사학자로서 얼마든지 보탬이 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 전 위원장은 현역 시절엔 공직자 신분이었던 탓에 다른 부처와 국회, 정책 수요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속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살얼음 걷듯 살아왔는데, 역사학자가 되니 자유를 만끽하며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어 너무나 만족스럽다고 했다. 관료로 살 때보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도 더 많아졌다. 지금 하고 있는 고대사 연구를 보강하는 한편 조만간 북극을 방문해 북극항로 등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연구도 시작할 계획이다.
이상적인 ‘은퇴 후 삶’이 무엇이냔 질문에 김 전 위원장은 “시대와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답했다. 현역에서 물러나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거라 여겨 소일거리나 하며 고립된 삶을 살기 쉬운데, 이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신 시대 변화를 수용하며 공부도 하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 전 위원장은 “기대 수명이 늘었기 때문에 과거와 달리 인생을 길게 보고 넓은 안목으로 은퇴를 설계해야 한다”며 “현직에 있을 때부터 미래에 어떤 활동을 하며 살아야 보람이 있을지 꾸준히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은퇴한 사람들에겐 “지금 은퇴자들은 기적의 현대사를 일군 역사적 증인들”이라며 “각자의 영역에서 쌓은 경륜을 후진들에게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언젠가 생을 마감할 때 ‘살다 보니 이렇게 돼버렸구나’하고 체념하게 된다면 삶이 너무 서글프지 않을까요? 푹 쉬는 건 죽고 나서도 충분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민족의 DNA를 갖고 있습니다. 기마민족이 그래왔듯 은퇴 후 또 한 번 도전에 나섭시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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