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관심 있게 보는 방송이 있습니다. EBS ‘건축탐구- 집’이라는 다큐멘터리인데, 매주 직접 집을 지어 만든 사람들에게 건축가들이 찾아가서 어떤 이유로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지 들어보는 프로그램입니다. 아마 여기까지만 들으신 분들은 “집을 ‘지어’ 산다니 나랑은 관계없는 사람들 이야기군”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부자의 고급주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도 서울에서 집을 구할 수 없어서 직접 집을 지은 젊은 부부, 대가족이 함께 살지만 각자의 사생활이 보장되게 하려고 문이 2개인 집을 만든 가족, 적게 소비하는 삶을 위해 6평짜리 농막 주택을 지어 사는 은퇴자 부부. 우리 삶에서도 흔히 공감할 만한 주제로 집을 지은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아니라, 자신의 ‘정서적 욕구’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실제 주거를 통해 심리적 욕구를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은 독일의 공간 심리학자 바바라 페어팔의 책 ‘공간의 심리학’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주거로 엿볼 수 있는 여섯 가지 심리적 특성을 소개하고, 스스로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 책에 직접 써보게 한다는 겁니다. 읽는 책이자, 쓰는 책이랄까요. 책에서 말하는 여섯가지 욕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싶은 안전 욕구, 휴식의 욕구, 외로움과 단절에서 벗어나는 공동체의 욕구, 자기 표현의 욕구, 자유로운 환경 구성에 대한 욕구, 심미적 욕구 등이지요.
주거로 자신의 욕구를 살펴볼 수 있다는 개념이 흥미로워, 상담에서도 이를 한번 시도해 보았습니다. 바바라가 말한 대로 문의 개수, 건물의 층수, 옥상 유무까지도 열어놓고 그림을 그렸지요. 그렇지만 내담자 전원이, 아니 저도 너무 어려웠습니다. ‘집을 지을 만큼 돈을 번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라는 지극히 한국적 생각이 상상을 눌렀던 거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그린 것을 다 지워버리고, ‘내부 구조’만으로 축소해 시도해 보았습니다. 역시나 훨씬 더 수월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요. 방식은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방을 10개쯤 그리고, 기능을 자유로이 채워 넣은 뒤 하나씩 줄여나가는 겁니다. 쓰리룸이 될 때까지. 즉, 나에게 가장 중요한 방들을 남기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각자 몰랐던 자신의 욕구를 직관적으로 마주했습니다. 저는 다소 충격도 받았지요. 최후까지 포기할 수 없는 방은 휴식ᆞ건강과 관련된 방이었고 취미와 관련된 방은 처음부터 그린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취미는 없고, 건강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제일 중요하다니, 서른다섯 청년치곤 다소 당혹스러운 구조인걸.’ 나도 모르던 나를 발견하는 의외의 지점이었지요. 저만큼이나 다들 의외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취미방을 사수하기 위해 침실을 포기하는 사람, 욕조를 없애느니 부엌을 줄이겠다는 사람, 지인들이 언제든 놀러 올 수 있게 개인 공간을 포기하고 거실을 커뮤니티 공간으로 상상하는 사람, 배우자에게서 잠시 떨어져 완전히 혼자가 될 수 있는 공간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사람 등.
그렇게 하나씩 방을 지워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매슬로의 욕구 단계를 재정립하는 실험이었던 셈입니다. 욕구 진단의 트리거로 작용한 거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열 개의 방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채워보고 싶으신가요? 하나씩 지워 나간다면 최후까지 사수할 베스트 3는 무엇인가요? 전세자금대출과 이자 상환 기간 생각을 잠시만 내려놓고 어릴 적 상상화 숙제처럼 그려보면 어떨까요?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결핍된 욕구와 가치관의 우선순위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자가진단 도구가 될지 모릅니다.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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