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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讀古典] 자산(子産)의 정치

입력
2019.07.16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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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자: 춘추전국시대'의 한 장면. 열국이 무력으로 싸우는 틈바구니에서 정나라의 자산은 나라를 어떻게 유지했는가. 탕누어는 현대 중국이 대국임을 내세울 게 아니라 그 시절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공자: 춘추전국시대'의 한 장면. 열국이 무력으로 싸우는 틈바구니에서 정나라의 자산은 나라를 어떻게 유지했는가. 탕누어는 현대 중국이 대국임을 내세울 게 아니라 그 시절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춘추시기 초기 수백의 제후국 중 두각을 나타낸 나라는 정(鄭)나라였다. 주(周)나라 왕실이 동천(東遷)하여 명맥을 잇게 된 것도 정나라의 역할이 컸다. 주나라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제후들에게 춘추시대의 개막은 새로운 기회였다.

정나라의 초기 행동은 기민했다. 정나라 장공은 무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키웠다. 주나라 천자와 인질을 교환할 정도였다. 그러던 정나라가 후계자 문제로 내분을 일으키더니 결국 일곱 귀족 가문이 권력을 농단하게 된다. 정나라가 귀족들 싸움으로 무너져 가는 사이 중원에는 제환공(齊桓公)을 거쳐 진문공(晉文公)이 등장했다. 이후 진(晉)나라는 패자(霸者)로 군림하였다.

그 와중에 남쪽의 신흥 강국 초(楚)나라가 부상하여 중원 제후국 전체를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초나라는 정나라를 중원 진출의 교두보로 여겼기에, 자기 세력에 넣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진나라 역시 전략적 요충지인 정나라를 반드시 거느리고자 하였다. ‘춘추(春秋)’를 읽다 보면 정나라에 대한 침략과 회유 기록이 하도 반복되어 어지러울 지경이다.

춘추 초기 기린아로 부상했던 정나라. 그러나 영광은 짧았다. 자산이 집정한 시기를 빼면 거의 동네북 신세였다. 내분도 극렬해 진나라에 붙자는 무리와 초나라에 붙자는 무리 간에 갈등이 폭발하여, BC566년에는 초나라 손을 잡으려 한 임금을 반대파가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정나라도 자신들의 위기를 절감하여 타개책을 찾고자 하였다. 문제는 적임자가 누구인가였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이 자산(子産, ?~BC522)이었다. 자산은 위에 언급한 정나라 일곱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귀족에 대한 반감을 누르고 일반 민중의 마음을 얻었는가.

‘좌씨전(左氏傳)’을 보면, 자산이 집권한 초기에는, 백성들이 ‘누가 자산을 죽이겠다면 나도 함께 하겠다’고 했다 한다. 그런데 3년의 시간이 흐르자 ‘자산이 죽으면 누가 우리 자식들을 가르치고 우리 재산을 늘려주겠는가’며 걱정했다고 한다. 자산의 태도를 보여주는 고사도 실려 있다. 정나라 사람들이 학교에 모여 자산을 비판하자, 어떤 사람이 학교를 폐지하자고 건의했다. 자산이 말하길, ‘내 정치의 이로운 점을 칭찬해 준다면 나는 그 정책을 속행한다. 비판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비판에 따라 정책을 바꾸면 그만 아니겠는가. 학교는 그대로 두는 것이 나라에 유리하지 않은가’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논어(論語)’에도 자산이 등장하는데 칭찬 일색이다. 참고로 흥미로운 점은 ‘한비자(韓非子)’도 자산을 현인으로 추앙한다는 것이다. 백가쟁명 하던 춘추전국시기, 법가 계열 학자들은 유가들이 칭송하는 인물에 부정적이기 일쑤였다. 따라서 한비의 자산 칭송에 대하여 학자들마다 해설은 분분하다. 자산이 중국 최초의 ‘형서(刑書)’,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성문법을 반포한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유력해 보인다. 필자는 자산이 법치를 내세운 이유가, 갈라진 국론을 하나의 원칙 아래 수렴하고자 했던 비원(悲願)의 발로가 아닌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논어’ 헌문(憲問)편에서 공자는 자산을 ‘혜인(惠人)’, 즉 ‘은혜로운 사람’이라고 단언하였고, ‘공야장(公冶長)’에서는 네 가지 덕목을 구체적으로 말하기도 하였다. ‘자산에게 군자의 도가 네 가지 있었으니, 자신의 행동거지는 공손하며, 윗사람을 섬길 때는 공경하며, 백성을 기를 때는 은혜로우며, 백성을 부릴 때는 의로웠다.” (子産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이 말을 풀이한 옛 학자들의 글을 보니 대략 다음 같다.

탁월한 사람이었지만 잘난 체 않았고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았다. 이것이 공손함이다. 네 임금을 섬겼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해이함이 없었다. 공경했다는 증거이다. 행정에서는 백성에게 이로운 일은 반드시 일으키고 해로운 일은 반드시 없애서, 백성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었다. 이것이 은혜롭다는 것이다. 백성을 부릴 때는 상하의 등급을 분별하고 피차의 이익을 고르게 하여 간교한 자들이 활개 치지 못하게 하였다. 의롭다는 증거이다.

공자는 자산의 세심한 외교 자세를 칭찬하기도 하였다. ‘정나라 외교 문서는 비침이 초고를 만들고, 세숙이 따져보고, 외교관 자우가 첨삭하고, 동리의 자산이 다듬었다.(爲命, 裨諶草創之, 世叔討論之, 行人子羽修飾之, 東里子産潤色之)’

정나라는 약소국이었고, 강대국들 틈에서 생사의 줄타기를 했다. 재상인 자산은 내정에 시달려도 외교문서까지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자산은 자기 자신의 재능에만 기댄 독단적 인간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오히려 적임자를 선발해서 일을 나누어 맡기고 마무리는 자신이 해야 했던 자산의 고단한 일생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좌씨전의 기록이다. BC522년, 자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자가 울면서 말했다. ‘그에게는 옛사람이 남긴 백성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子産卒, 仲尼聞之, 出涕曰, 古之遺愛也)’

박성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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