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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동서교회의 분열(7.16)

입력
2019.07.16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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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교회의 심장이자 동서교회 분열의 거점이었던 터키 아야소피아 대성당(현 박물관)
동방정교회의 심장이자 동서교회 분열의 거점이었던 터키 아야소피아 대성당(현 박물관)

희랍어 ‘카톨리코스(catolicos)’는 ‘보편’이란 뜻이고, 가톨릭이란 말이 거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하지만 ‘보편 교회’ 가톨릭은 크게 두 차례 분열했다. 11세기 동서교회의 분열과 16세기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분열이다. 처음을 영어권에서는 ‘거대한 분열(The Great Schism)’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분열’은 다른 편에서 보면 ‘독립’이다.

초대 교회의 터전은 당연히 예루살렘이다. 가톨릭은 예루살렘 외에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 오늘날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안디옥(안티오케이아)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등 4개 교구, 가장 서쪽의 로마 교구 등 5개 교구로 세를 넓혔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로마(교구)는 교회의 새로운 중심지로 입지를 굳혔다. 제국 정치의 수도였고 경제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330년 황제는 수도를 유라시아의 경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전, 동로마 비잔틴 시대를 열었다. 서로마는 게르만 등 이민족 침입으로 100여년 만에 멸망했고, 이탈리아 반도도 프랑크 왕국의 지배 하에 들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베드로의 시신이 묻힌 로마제국 교회 원년의 권위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점차 가톨릭 교회의 신도심으로 급부상했다. 애당초 지리적으로도 로마와 나머지 4개 교구는 분리돼 있었다. 언어도 로마교회는 라틴어를 썼지만 나머지 교구 교회는 희랍어(헬라어)를 썼고, 전례의 형식도, 신성에 대한 이해도 달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을 둘러싼 이른바 ‘필리오케(Filio Que)’ 교리 논쟁 등 갈등이 이어졌다. 보편 교회의 머리(교황)는 로마에 있었지만, 심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격이었다.

1054년 7월 16일 토요일 오후, 교황 레오 9세의 특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야소피아 성당에 들이닥쳐 교황 칙서를 전달했다. 동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대주교 마이클 케룰라이오스를 파문한다는 내용이었다. 교회 통용어 문제를 둘러싼 신경전의 결과였고, 그로써 동서교회는 공식 분열했다.

물론 교회 분열의 시작은 제국의 분열이었다. 신앙과 보편 교회를 통한 제국의 정신적 통일이라는 콘스탄티누스의 구상은 제국이 쪼개진 뒤부터, 서유럽과 비잔틴 세계의 세속 권력이 대립하면서부터 이미 난망한 꿈이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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