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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당신의 런던] "환경파괴 기업은 후원 중단하라" 트래펄가 광장 공연에 예술인들 뿔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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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당신의 런던] "환경파괴 기업은 후원 중단하라" 트래펄가 광장 공연에 예술인들 뿔났다

입력
2019.07.13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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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축소판’ 같은 다양성이 있고, 그 다양성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도시 런던의 이야기를 <한국일보>가 3주에 한 번씩 토요일에 연재합니다. 런던에서 유학 중인 김혜경 국경없는기자회 한국특파원이 그려내는 생생한 런던 스토리의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지난 2일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열린 로열오페라하우스의 '빅스크린' 행사. 석유기업 비피(BP)가 후원하는 이 행사는 질좋은 공연을 무료로 생중계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됐다.
지난 2일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열린 로열오페라하우스의 '빅스크린' 행사. 석유기업 비피(BP)가 후원하는 이 행사는 질좋은 공연을 무료로 생중계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됐다.

영국을 대표하는 극단인 ‘로열셰익스피어극단’과 30년 동안 인연을 맺어온 주연급 배우 마크 라이런스 경이 지난달 돌연 극단과 이별을 선언했다. 한국에는 영화 ‘덩케르크’ ‘스파이 브릿지’로 잘 알려진 배우다.

그는 연극계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토니상을 세 번이나 받았고(그중 한 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십이야’를 통해서였다), 런던 셰익스피어글로브극장의 초대 예술감독을 지냈다.

이처럼 셰익스피어를 빼고 연기인생을 논하기 어려운 라이선스 경의 사임 이유는 영국 석유기업 BP가 극단을 후원하고 있다는 것. 2016년부터 이 지원을 통해 극단은 16~25세 관객들에게 티켓 일부를 5파운드(약 7,500원)에 제공해왔다.

라이선스 경은 해당 거래에 대해 “극단이 지구의 미래를 위협하는 파괴적 행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고 일갈했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기후변화가 심화하는데 극단이 석유기업의 이미지를 ‘아트워싱(Art Washingㆍ기업이나 단체가 예술지원을 통해 이미지를 개선하는 행위)’해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또 그는 “무기상, 담배회사, 또는 살아있는 사람이나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다른 주체만큼이나 BP와 엮이고 싶지 않다”면서 “윌리엄 셰익스피어도 그랬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30년 인연이 3년간의 물적 지원을 이기지는 못했다. 라이선스 경의 발표 뒤 극장 측은 “그의 오랜 협력에 감사한다”면서도 “BP의 후원으로 많은 젊은이가 우리 작품을 볼 수 있었으며, 관객들은 이 프로그램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놨다.

BP는 비슷한 측면에서 대영박물관과 내셔널갤러리, 로열오페라하우스 등 런던의 대표적인 예술기관들을 후원하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순수 예술의 문턱을 낮추는 데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2일 찾은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의 ‘빅스크린’ 행사도 그중 하나였다. 극장은 BP 지원을 받아 매년 여름마다 영국 전역 야외공간에서 주요 오페라와 발레 작품을 무료로 생중계하고 있다.

이날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는 대형 스크린 앞에 수백 명의 시민이 가족 혹은 친구 단위로 모여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장에 데려가기 힘든 어린아이들도 여기서만큼은 자유로워 보였다.

스크린 속 막이 열리자, 가장 분주한 런던 중심가는 금세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각자 자리에 앉아 아무도 시야를 방해하지 않았다. 허공에는 오로지 가수들의 노랫소리로 가득 찼다. 노천 행사에도 관객들의 관람 매너는 탁월했다.

여기서 만난 런던 시민 로레인 로위는 “20년 넘게 런던에 살면서 오페라는 처음”이라며 “로열오페라하우스는 비싸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카르멘’의 현장 티켓 가격은 1만원대부터 30만원까지 다양했지만 화려한 극장의 오페라는 그 자체로 장벽이 있었다.

그는 카르멘 역을 맡은 가수의 음색을 상세히 묘사할 정도로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로 오페라라는 장르에 관심이 생겼어요. 다음 행사에도 참여하고 싶어요.”

로열오페라하우스에 따르면 BP가 ‘빅스크린’에 후원을 시작한 2000년 이래 지금까지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온라인 스트리밍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90만 명으로 늘어난다.

BP의 후원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캠페인단체 ‘BP or Not BP’는 “환경을 파괴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기업이 좋은 평판을 만들어내기 위해 예술에 후원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대영박물관이나 로열오페라하우스의 경우, 전체 수익의 1%도 되지 않는 금액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BP가 이들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사실 과거에도 ‘아트워싱’을 반대하는 움직임은 있었다. 무기 거래상의 후원을 꺼린 것이 대표적이다. 영국에서는 석유회사 후원 반대 캠페인도 2003년부터 시작됐는데, 오랫동안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6년 테이트모던이 BP의 후원을 끊어내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의 후원관계는 무리없이 지속됐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다른 모양새다. 한 달 새 음악과 연극, 미술로까지 활동이 번지고 있다. 로열오페라하우스의 ‘빅스크린’ 행사를 앞두고 200명의 음악가는 기후 위기를 선언한 사디크 칸 런던 시장에게 장소 허가를 중단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또 아니쉬 카푸어, 사라 루카스 등 미술계 작가들은 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 앞에서 BP의 후원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미술관장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이들은 “BP는 가용 자본 중 97%를 화석연료에, 겨우 3%만을 재생가능에너지에 투자하고 있다”며 심화하는 기후 위기 속에 미술관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런던에서 예술의 공공성은 접근성을 넘어 새로운 버전으로 진화하는 듯하다. 그 중심에는 창작자와 예술가가 있다. 예술가가 없으면 예술기관도 존재할 수 없기에 이들의 행동은 울림이 크다. 과연 다윗은 거대자본 앞에서도 골리앗을 이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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