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잡한 워싱턴 외교가… WP“트럼프 행정부 무능 증명된 셈”
킴 대럭 전 주미 영국대사. AP 자료사진

“외교 전문을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세계 외교의 중심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활동하는 각국 외교관들이 고민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행정부를 “무능하다”고 평가한 외교 전문(電文)을 작성한 킴 대럭 주미 영국대사가 트럼프 대통령의 집중포화를 맞고 10일(현지시간) 끝내 사임하면서 “혹시 나도 대럭처럼 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에 휩싸인 것이다. 외교관으로서 주재국 정부를 소신 있게 평가조차 못하는 처지에 대한 한탄은 물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아첨’만이 살길이라는 냉소가 워싱턴 외교가를 뒤덮었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이날 “대럭 대사 사건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영국 외교관들이 본국에 보낼 외교전문에 어떤 내용을 써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며 “급기야 외교관들이 본국으로 보낼 외교전문을 스스로 검열(self-censorship)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 행정부를 혹평했다가는 외교관으로서 워싱턴에 발붙이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에 외교 전문을 선별적으로 본국에 보낼 것이란 뜻이다.

주미 외교단 사이에서는 대럭 대사에 대한 동정의 분위기마저 감지된다고 한다. 뉴욕타임스(NYT)는 “많은 외교관이 ‘나도 같은 내용(트럼프 행정부를 저평가한)의 보고서를 썼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 떼밀려 사실상 워싱턴에서 쫓겨난 대럭 대사의 처지를 보며 “나도 언제 저런 상황에 몰릴지 모른다”는 동병상련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봄 은퇴한 제라드 아르도 전 주미 프랑스 대사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모두가 그(대럭)와 비슷한 평가를 내렸을 것”이라며 대럭 대사를 두둔했다.

비난의 화살은 트럼프 대통령을 향했다. 대니얼 프라이드 전 미 국무부 차관보는 워싱턴포스트(WP)에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은) 지저분한 외교 조치였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무능하다는 대럭 전 대사의 평가가 사실로 증명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주재국 정부를 정직하게 평가해 본국에 보고해야 하는 자국 주재 외교관의 역할에 대한 존중은커녕 오히려 그를 비난하는 등 낮은 수준의 대응을 보였다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자신을 비판하는 전문을 보냈다는 이유로 대럭 대사와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사실상 외교기피 인물로 그를 낙인찍었다. 곤경에 처한 대럭 대사는 영국 정부에 10일 사의를 표했다.

CNN도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 대사들을 향해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만이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누구를 대사로 파견할지에 대한 결정권은 주재국이 아닌 파견국이 갖는 게 기본적인 외교인데 이번 사건은 이 같은 기본적인 외교가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왔다는 평가다.

불똥은 차기 영국 총리로 유력한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에게도 튀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날 “외교 전문 유출로 인한 논란으로 거취를 고민하던 대럭 대사가 TV토론에 출연한 존슨 전 장관의 자신에 대한 발언을 듣고 사임을 결심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존슨 전 장관은 9일 보수당 당대표 경선 TV토론회에서 미ㆍ영관계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실상 대럭 대사를 보호해줄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앨런 던컨 영국 외무부 차관은 “존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국 대사를 물 먹였다”며 “차기 총리에 도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행동은 비열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에밀리 손베리 영국 노동당 예비내각 외무장관도 “도널드 트럼프의 짜증으로 대럭 대사가 일자리를 잃게 됐다”며 “존슨의 애처로운 대응 방식이 영국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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