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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의 한 대형병원 앞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약사 A씨는 최근 약값 환불 문제로 한 만성 C형 간염 환자와 실랑이를 벌였다. 이 환자는 지난 주 2개월치 약을 처방 받아 약을 구입했는데 복용 1주일 만에 두통과 피로증세가 심해져 약 복용을 중단했다. 한 알에 13만원인 고가 약이라, 건강보험이 적용(70%)됐는데도 환자가 낸 돈은 200만원이 넘었다. A씨는 “처방에 의해 나간 약은 반품이나 환불이 불가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좀처럼 납득하지 않았다”면서 “1~2주 단위의 소포장으로 약이 공급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다제내성 결핵환자로 최근 1정 당 15만원이 넘는 결핵약인 ‘서튜러’ 24주치(188정) 처방을 받았던 박모(43)씨는 두통, 메스꺼움 등 이상 반응을 보여 1주일 만에 약을 끊었다. 하루 4정을 복용해 152정이나 남았지만, 남은 약들은 고스란히 쓰레기통으로 갔다. 희귀난치성 질환에 대한 건강보험 특례(100%)가 적용돼 박씨가 낸 돈은 없었지만, 2,400만원이 넘는 건강보험재정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박씨는 “어쩔 수 없이 복용을 중단했는데, 돈도 아깝고 약도 아깝다”고 말했다.

만성질환자나 암환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고가의 약 복용을 중단할 경우, 그대로 버려지는 일을 막기 위해 약품 소포장 제도의 활성화가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대부분 다국적제약사 제품인 항암제의 경우 한달 약값만 300만~1,000만원 인데, 이런 고가약이 버려져도 제약사는 손해를 보지 않는다. 환자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줄 뿐 아니라 건강보험 재정에도 적지 않은 부담을 주는 만큼 약품 소포장 제도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게 현장의 목소리다.

‘의약품 소량포장단위 공급에 관한 규정’(2016년 8월 시행)에 따르면, 제약사나 수입업자는 제조 및 수입량의 10% 이상에 대해 △낱알모음포장은 100정ㆍ캡슐 이하 △병 포장은 30정ㆍ캡슐 이하로 약국과 병ㆍ의원에 공급하도록 돼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해 이 규정 위반건수는 31건. 하지만 처벌규정은 제조업무정지 최대 1개월로 솜방망이 처벌이다.

제약사들은 관행적으로 4주치(84정)단위로 공급한다며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 규정이 너무 느슨하다는게 약사들의 주장이다. 전체 물량의 일부라도 1주일(21정)혹은 2주일(42정) 단위로 공급해야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약사 B씨는 “약 부작용이나 완치로 복용을 중단할 경우 수개월치 약이 그대로 버려지고 있다”며 “제약사들은 포장비용 상승 등의 이유로 소포장을 꺼린다”고 말했다.

의사들이 환자의 경제여건 등을 고려해 1~2주치를 처방해도 약들이 버려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경기도의 한 대학병원 앞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약사 C씨는 “약 포장을 뜯어 1~2주치를 팔면 남은 약들은 재고가 되는데 동일한 처방을 받은 환자가 오지 않으면 판매할 수 없고, 유효기간이 지나면 폐기처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약국에서 이런 고가 약들은 애물단지”라며 “제약사에서 판매하지 못한 약들을 반품처리를 해도 결국 폐기처분되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낭비”라고 덧붙였다. 대한약사회는 이렇게 버려지고 있는 불용(不用)재고 의약품 규모를 연 100억원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고가 약품의 상당수가 버려지고 있지만 보건당국은 소포장제도 강화에는 소극적이다. 식약처 대변인실 관계자는 “제약사들에게 소포장제도를 적극 권유하고 있지만 약사와 제약사 등 이해관계 때문에 법으로 강제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동근 대한약사회 부회장은 “제약업체들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들은척 만척 한다”며 “저가의 약이라면 모르겠지만 고가 약품의 소포장제도 활성화는 건강보험재정 건전화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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