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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저금리의 배신

입력
2019.07.11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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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가계부채에 의존한 성장의 위험성을 경고한 연구서 ‘빚으로 지은 집(House Of Debt)’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 경제학자 아티프 미안(프린스턴대)과 아미르 수피(시카고대)가 최근 동료 학자 어니스트 리우(프린스턴대)와 함께 발표한 논문은 '낮은 금리가 기업 투자를 촉발해 경기를 자극할 것'이란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제로 기준금리는 물론이고 돈을 찍어 천문학적 규모로 채권을 사들이는 양적완화까지 동원해 시중금리를 떨어뜨렸던 주요국 중앙은행의 정책적 선택이 온당했는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은 ‘선도기업’과 ‘추종기업’으로 구성된 경쟁 모형을 구축해 초저금리 환경에서 양측이 시장지배력 강화를 위해 어떤 투자 전략을 취할지를 탐구했다. 이 모형에서 두 기업의 생산성이 엇비슷하다면 둘 다 시장점유율을 늘리려 경쟁적으로 투자에 나서게 된다.(완화적 통화정책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반대로 원래 그랬든, 투자 경쟁에서 우열이 갈렸든 간에 생산성 차이가 상당하다면 선도기업이 투자를 늘릴수록 생산성 격차, 나아가 시장지배력 격차가 확대된다. 어느 쪽이든 상식적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생산성 격차가 벌어지면 선도기업은 이 참에 시장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려 투자를 확대하는 반면, 추종기업은 투자 비용에 걸맞은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투자를 줄이게 된다. 문제는 역전이 어려울 만큼 생산성 격차가 커지고 나면 선도기업 역시 투자할 유인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초저금리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소수 선도기업에 지배력이 집중되는 독과점 구도로 시장이 재편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논문은 나아가 1980년대 이후 미국 시중금리, 기업 수익률 및 시장점유율 자료를 계량분석해 모형에서 도출된 시나리오가 실제 현실과 부합한다는 점을 입증했다. 연구자들은 “(소수 기업의)시장 집중도 확대, 산업 활력 저하, 기업 양극화, 생산성 둔화 등의 현실이 금리 하락과 관련있음을 입증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저금리의 부정적 영향을 경계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는 양상이다. 클라우디오 보리오 국제결제은행(BIS) 통화경제국장은 최근 보고서에서 중앙은행 기준금리 결정 과정에 기준지표로 통용되는 중립금리(무리 없는 성장이 가능한 금리 수준)가 금융안정 측면에 대한 고려 없이 낮게 산정돼 과도한 저금리를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통화정책이 지나치게 완화적인 경우 장기적으로 금융불균형이 초래되면서 생산량 손실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저금리의 부작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012년 이래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한때 사상 최저인 연 1.25%까지 끌어내리며 한국 경제사상 유례 없는 통화 완화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성장률은 매년 3% 안팎에 머물며 좀처럼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물론 저금리 정책 덕에 이나마 성장세를 유지했다는 반론도 있다.)

미안ㆍ수피ㆍ리우 교수가 지적한 기업 양극화 심화 조짐도 감지된다. 한은에 따르면 2012년 국내 중소기업의 매출액 증가율(전년 대비 7.0%)이 대기업(4.5%)을 2.5%포인트 앞섰지만, 지난해엔 대기업(4.3%)과 중소기업(3.9%)의 관계가 역전됐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생존 기업(이자보상비율 100% 미만) 비율이 지난해 30%대(32.3%)로 진입한 것은 낮은 금리가 ‘좀비 기업’을 연명시키고 있다는 의심을 키운다.

국내총생산의 80%를 웃도는 가계부채는 그 자체로 명백한 저금리의 그늘이다. 경제 당국은 가계대출의 70% 이상(3월 말 72.6%)이 고신용자(1~3등급) 대출이고 저신용(7~10등급) 비중(5.7%)은 얼마 되지 않아 부실 우려가 낮다지만, 이는 뒤집어 보면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빌릴 수 있는 혜택을 여유 있는 이들이 독차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기의 터널을 벗어나는가 싶더니 재차 가라앉고 있는 세계 경제의 현실 앞에서 각국은 또 한 번 통화 완화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부작용을 잘 살펴 이행할 때다.

이훈성 경제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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