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인 6월 중순, 서울 강남 코엑스는 책으로 인해 여름 더위가 조금 빨리 시작된 듯했다. 여러 출판사 관계자들이 자사의 책을 알리려 땀을 흘리고 있었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을 위한 공간에 모여,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 입장으로 이런 행사가 좋다. 언제나 위기감을 고조시키며 사양 사업의 뒤태만 보여 주던 출판이, 짧게나마 주인공으로 나서는 시간이니까. 서울국제도서전 이야기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홈페이지에 의하면 서울국제도서전은 1954년 전국도서전시회로 시작해 1995년 국제도서전으로 격상되었다고 한다. 1954년의 도서전을 상상하자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그 시절에는 어떤 책이 인기였을까. 알기로는 ‘자유부인’이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데… 하는 상념에 잠길 새도 없이 일감이 몰려들었다. 부스가 완성되는 대로 도서를 정리하고, 사인회 등의 내ᆞ외부 행사를 준비하고, 해외 에이전시, 에디터와 미팅도 하루에 몇 건씩 가져야 했다.
대형 출판사 몇은 명성대로 크고 화려한 디자인의 부스를 준비했다. 작지만 내실 있게 부스를 꾸민 출판사도 많았다. 지역 서점과 독립 출판을 위한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어 근래의 출판 시장 분위기와 트렌드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각 출판사의 주요 신작과 기발한 굿즈를 둘러보는 것도 도서전의 재미일 것이다. 이에 부응하듯 도서전 현장은 평일에도 북적였고, 주말에는 입장하는 데 꽤나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사무실에 앉아 편집 업무를 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독자와 직접 대면하는 기회도 나쁘지 않았다. 몸은 힘들지만 기분 좋은 분주함이 거기에 있었다.
사실 도서전의 분위기가 늘 같았던 것은 아니다. 전후의 도서전은 알 수 없으나, 정가제 이전의 도서전은 기억할 수 있다. 출판사는 평소보다 몇 배나 되는 현장 할인으로, 도서전은 재고 떨이의 기회로 삼았고 독자는 정가보다 훨씬 저렴한 책을 골라 담았다. 도서전이 도서 전시보다는 할인 마켓에 더 가까웠으니 환단고기니 창조과학이니 하는 책들도 한자리씩 차지할 수 있었으리라. 여기에 영유아, 어린이 전집까지 가세하면 그야말로 대목 앞둔 시장이었다. 이토록 기이했던 흥성함도 도서정가제가 강화되자 자취를 감췄다. 가격이 아닌 콘텐츠와 구성으로 승부를 보아야 했고, 이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하다.
아쉽고 보완해야 할 점도 여전하다. 소수 언어로서 한계가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도서전의 주목적은 책의 판매가 아닌 콘텐츠의 거래여야 하는데, 아직까지 번역 수출에 있어 유의미한 결과가 도출되는 자리로는 역부족이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 자리한 저작권 미팅 테이블은 도서 판매 부스와 비교하기가 무색할 만큼 한가했다. 부스 사용료가 만만치 않아서인지 중소 출판사의 참여 또한 미진했다. 출판의 주요한 가치인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규모와 상관없이 다양한 주체가 활동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할 것이다.
주요 출판사 부스가 있던 A홀을 지나 B홀로 들어서면 책이 아닌 빵이 있었다. 그 뒤쪽에 자리한 독립 출판사의 전시가 무색할 만큼 긴 줄이 고소한 기름 냄새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빵과 장미가 있을 때, 장미를 선택하는 사람은 꽤 있겠지만 빵과 책이 있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빵을 선택할 것이다. 아쉽다고 말하기에 대전 명물이라는 고로케는 너무나 맛있었지만, 뒷맛은 조금 썼다. 도서전이 끝나고, 책은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와 다시 일상이다. 과연 책은 빵과 장미를 제치고 독자인 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분주했지만 그 답을 찾기에는 못내 짧았던, 올해의 서울국제도서전이었다.
서효인 시인ㆍ문학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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