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으로 세계 경제에 보호무역주의 기류가 강화되자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FTA) 범위를 늘리며 자유무역 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EU는 협정 체결 과정에서 무역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노동ㆍ환경 규정 준수를 상대국에 요구해 그 배경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국제규범의 중심’을 자처하는 유럽의 특성이라는 분석 한편으로, 미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교역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라는 관측도 나온다.
9일 외신 등에 따르면 EU는 지난달 28일 브라질ㆍ아르헨티나ㆍ우루과이ㆍ파라과이 등 4개국으로 구성된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과 20년 만에 FTA 협상을 타결한 데 이어 30일엔 EU-베트남 자유무역협정(EVFTA)에 서명했다. EU가 최근 무역협정 체결에 적극 나서는 것은 관세 철폐라는 경제적 이익은 물론이고,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에 맞서 자유무역 진영을 수호하겠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발신하기 위한 목적이란 분석이 나온다.
EU의 FTA가 여느 무역협정과 다른 점은 ‘무역과 지속가능 개발’ 조항을 삽입해 노동ㆍ환경 등 사회적 의제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메르코수르와의 협약에는 2015년 이른바 ‘파리 협정’으로 불리는 기후변화대응협약을 준수하고 삼림 파괴 방지를 위한 행동을 취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집권 이후 브라질 정부의 아마존 개발 의도에 제동을 건 셈이다.
베트남과의 FTA 체결은 서명 전까지 노동과 인권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베트남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가운데 5개를 비준한 상황인데, EU가 남은 3개 협약의 비준과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한 것이다. 유럽의회는 1월 EVFTA 비준 연기를 발표하며 “베트남의 인권 개선을 촉구했으나 아직까지 적극적인 대응이 없다”며 압박하기도 했다.
환경ㆍ노동 관련 조항은 2000년대 들어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공정경쟁 원칙을 준수하라는 차원에서 요구해 온 것이다. 개도국 기업이 노동권을 침해하며 저비용으로 상품을 생산할 경우 노동 규정을 지키는 선진국 기업은 불공정 경쟁에 처하게 된다는 논리다. 대미 무역수지 흑자를 거둔 국가를 대놓고 공격하는 미국식 보호무역주의는 아니지만, 국제 규범을 명분 삼아 우회적으로 교역 불균형을 견제하려는 장치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각에선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노동ㆍ환경 문제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자 유럽이 관련 의제를 더욱 강조하며 ‘도덕적 우위’에 서고자 한다는 관측도 있다.
다만 EU가 체결한 FTA의 노동ㆍ환경 조항들은 강제 규정이 없다. 실질적 제재 조치가 불가능하다 보니 EU 내부에서도 실효성 없는 ‘패션 조항’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하지만 EU가 우리나라를 상대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보듯이 명문화된 강행 규정이 없을 뿐 사실상 ‘준사법 절차’를 동원해 준수를 강제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흥종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EU는 한국과 FTA가 체결된 지 8년이 지나도록 ILO 조약 비준 노력에 진전이 없다고 압박하고 있다”며 “강행 규정이 없다고 해서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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