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반러 시위 맞물려 반러 정서 재차 자극
옛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인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야)의 TV 방송 진행자가 방송 도중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악취 나는 점령자”라고 표현했다. 최근 조지아 내 대규모 반(反)러시아 시위 여파가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건이 터지며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됐다.
리아노보스티 통신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조지아의 유력 민영방송 ‘루스타비 2’의 주말 시사평론 프로그램 진행자 게오르기 가부니아는 7일 저녁(현지시간) 정규 방송에서 갑자기 조지아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말을 바꾼 뒤 푸틴 대통령을 향해 “악취를 풍기는 점령자”라고 비난하며 “푸틴과 그의 노예들에게는 우리의 아름다운 땅에 설 자리가 없다”고 발언했다.
조지아의 반러 정서는 뿌리 깊다. 옛 소련에서 독립한 조지아는 2003년 무혈 ‘장미혁명’ 이래 친(親)서방 노선을 택했다. 반면 조지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고 싶었던 러시아는 조지아 내에서 분리ㆍ독립운동을 폈던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지원했고, 이는 결국 2008년 8월 양측 간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 결과 조지아는 전체 영토의 20%를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에게 내주며 러시아와는 그 즉시 단교했다. 가부니아의 이날 발언 역시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러시아를 겨냥한 발언이다.
가부니아의 푸틴 비난 발언이 방영된 뒤 방송사 주변엔 친러시아 성향 시청자 수백 명이 몰려와
계란과 물병을 던지는 등 격한 시위를 벌였다. 니카 그바라미야 사장이 시위대의 과격 행동으로 방송사 직원들이 위험에 처했다며 방송 송출 중단을 지시해 이튿날 아침까지 모든 방송이 중단됐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한 조지아 정부는 즉각 가부니아의 행동을 질책하고 나섰다. 살로메 주라비슈빌리 대통령은 “가부니아의 행동은 조지아의 전통에 부합하지 않으며 조지아와 러시아 관계를 악화시키는데 일조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러시아 정부와 정계도 발끈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우리나라와 대통령에 대한 모욕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며 “우리는 그것을 단호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러시아 외무부도 논평을 내고 “저속한 표현으로 러시아 지도부를 부당하게 공격한 유례없이 낮은 수준의 적대 행위를 단호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으로 조지아 내 강한 반러 정서가 새삼 부각되며 양국 간 외교 갈등은 더욱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달 대규모 반러 시위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재차 조지아 국민들의 반러 정서를 자극할 가능성도 있다. 조지아에서는 지난달 정교회 국가 의회 간 모임인 ‘정교회 의회 간 회의(IAO)’ 의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하원의원이 조지아 의회 의장석에서 러시아어로 연설한 사실이 알려지며 대규모 반러 시위가 수일 간 지속됐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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