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조영래, ‘전태일 평전’). 이 다짐은 청년 전태일이 평화시장을 떠나 삼각산 기도원에 머물던 1970년 8월 9일 일기의 내용이다. 여공이 피를 토하고 죽은 사건에 충격을 받은 후 전태일은 이제까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엄청난 생각, 즉 그 잔인한 근로조건을 노동자의 힘으로 바꾸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후 일어난 일과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해선 특별히 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970년 11월 13일, 그 사건이 일어난 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새로 시작되고 지식인은 노동 현실을 자각하고 성찰하며 참여했다.
전태일은 단일한 성격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가장 빈곤하게 자라나 청계천의 봉제공장에서 재단사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그는 경제성장기 ‘산업전사’의 전형이고, 기업과 근로자가 공존하는 사업장을 만들려 한 ‘이상주의자’이며, 가장 약하고 천대받던 여공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한 ‘노동운동가’이다. 그리고 분신 당시 외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란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장식적 법률에 불과하던, 노동법의 역할에 주목함으로써 법률가들의 성찰을 유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지금 한국 경제의 번영, 민주주의의 발전, 근로조건의 향상과 노동법 등은 22세의 청년 전태일에게 빚지고 있다. 자본의 이익이 가장 우선시되던 그 무렵, 그는 인간 상호간의 연대와 노동관계에서도 법의 규범력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일반 원칙을 한국 사회에 일깨웠고,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개정된 교육과정은 전태일의 이런 특징을 잘 드러낸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과 사회ㆍ문화의 변화’를 서술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학습 요소 중에 개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전태일 분신 사건’이 유일하다. 이것은 그 사건의 사회경제적 중요성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와 함께 전태일의 희생과 공헌의 의의를 보수ㆍ진보의 이념적 구분을 넘어 공동체 전체가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전태일의 삶과 고민을 이해한다면, 어떤 사람도 그를 급진적이라 말하거나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태일의 이와 같은 희생과 공헌에 대한 국가적 승인은 여전히 미뤄진 상태이다. 국가보훈기본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특별히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을 희생공헌자로 보고, 국가유공자법 시행령 제6조는 소관 중앙행정기관장이 ‘국가의 민주발전과 사회정의의 구현에 이바지하여 국가발전에 뚜렷한 공로가 있는 자’를 특별공로(순직)자 등으로 추천하면 국무회의의 의결을 통해 국가유공자법의 적용 대상자로 삼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전태일의 희생에 대한 국가적 승인과 예우와 관련하여 고용노동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노동계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전태일은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각을 통해 가장 취약한 노동계층을 위해 희생하였다. 이 점에서 전태일은 5ㆍ18 민주유공자나 민주화보상 대상자 등과 같이 집단별로 예우하는 일반적인 보훈 체계에 포섭되기 어렵고, 따라서 특별공로자 등의 의결 방식을 통해 국가적 예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노동계는 전태일의 희생에 대한 국가적 승인을 얻는 데 소홀했다. 그런데 전태일의 이상과 희생은 비정규직 문제,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 등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노동계는 우리가 다시 전태일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전태일의 국가유공자 추천 청원이기를 희망한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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