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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동소문로의 붉은 달리아

입력
2019.07.08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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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 동숭동에 위치한 낙산공원의 성곽에 나있는 구멍 사이로 본 도심의 야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에 위치한 낙산공원의 성곽에 나있는 구멍 사이로 본 도심의 야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제는 쉽게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술 몇 잔을 마시면, 머릿속에서 형광등이 반짝 켜지고 눈앞이 환해지는 시간이 오지 않는다. 그런 세상이 아니고, 그런 내가 아니다.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오징어 튀김에 막걸리 두어 잔을 마시고, 멸치 육수에 만 국수까지 먹고, 너무 배가 불러 버스 정류장 두서너 군데를 그냥 지나쳐 걷는다. 취한 것도 아니고 취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어설퍼진 마음이 슬그머니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이제 세상은 제대로 캄캄하지도 않구나. 빈틈없이 구석구석 배경을 채우는 짙은 어둠은 이제 사라졌구나. 얼룩덜룩한 조명과 얼룩덜룩한 소리. 가짜 어둠과 가짜 빛. 그 사이를 취할 새도 없이, 피할 새도 없이, 나는 걷는다.

가로등 아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달리아가 나타난다. 두리번거리며 휘청휘청 걸어가고 있는 나의 무릎 옆에 쓱 솟아오른다. 빛바랜 고무장갑 같은 붉은색이다. 달리아는 원래 미제 드롭스 사탕처럼 알록달록 빛나는 것 아니었나. 요즘은 꽃들조차 빛이 선명하지 않구나.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왼쪽으로는 도로 위에 줄지어 서 있는 버스와 자동차들, 건너가라, 건너가지 말아라, 지시를 내리는 신호등이 있다. 오른쪽에는 엘리트 학생복, BYC, 배달 전문 피자 가게 간판들. 그리고 연극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는 담벼락이 있다. 나는 포스터를 오래 들여다본다. ‘어디에도 닿지 않는 다리’라는 한 줄 홍보 문구가 눈에 띈다.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읽어 본다. 머릿속에 문득 벤치에 앉아도 땅에 닿지 않아 달랑달랑 흔들리던 다리가 떠오른다. 책걸상이라 부르던 그 의자에 앉아도 바닥에 닿지 않던, 짧고 가늘었던 아이의 다리.

동소문로 주위에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전, 따개비 같은 집들이 산비탈을 뒤덮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시멘트 담벼락에 주먹을 긁으며 골목을 걸어 올라가던 아이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일부러 살갗을 갈아서 흐르는 핏방울을 핥아먹던 아이. 유난히 작고 말라서 머리통만 커 보이던 아이. 스무 살 무렵 나는 부잣집 아이들에게 대학에 들어가는 법을 가르쳐 비밀스럽게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리바이스 청바지를 사 입고, 아주 가끔 친구들의 외상 술값을 갚아주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아직 콘크리트로 덮여 있던 성북천 위 가건물에서 초등졸업 학력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동네 아이들에게 음악과 도덕을 가르쳤다. 이따금 과외비를 받아서 지갑이 두둑한 날에는 아이들과 시장에 가서 떡볶이를 사 먹었다. 떡볶이와 어묵 꼬치들을 치우며, 국물 속에 있는 무까지 싹 먹어치우는 애들이 다 있네, 라고 혀를 쯧쯧 차는 포장마차 주인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기도 했다.

아이는 이제 사십대를 바라보는 어른이 되어, 떡볶이나 어묵탕 속 무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을 거다. 짜장면이나 탕수육, 냉면이나 만두 같은 것쯤은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을 거다. 벤치에 앉아도, 전동차나 버스 좌석에 앉아도, 바닥에 닿는 길고 튼튼한 다리를 갖게 되었을 거다. 덜 취한 김에 괜히 가짜 어둠이니 진짜 빛이니 투덜댈 것 없다. 그 아이가 여전히 세상에 존재한다면, 비로소 세상은 아름답다.

달리아는 그다지 섬세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겹겹이 두툼한 꽃잎은 개수를 세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붉거나 노랗고 주황색으로 여럿이 어울려 알록달록 피어 있어야 비로소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퇴락한 거리 한 귀퉁이에 홀로 솟아오른 달리아는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무연히 시들어갈 뿐이다. 어디에든 가 닿으리라고, 다알리아, 다알리아, 지나가는 사람들 무릎 높이로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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