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신뢰 훼손’ 명분으로 내세워… 21일 선거 후에도 장기전 예상
일본 정부가 한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규제 강화를 단행한 4일은 참의원 선거(21일 투ㆍ개표)의 공식 선거전이 시작된 날이었다. 사실상 ‘한국 때리기’로 선거에서 지지층인 보수층을 결집하겠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포석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다만 참의원 선거 이후에도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한국의 양보가 없는 한 한일 정면충돌은 잦아들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일본 정부가 ‘한일 신뢰관계 훼손’을 경제 보복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일본 관방부 부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한국이)불합리하고 상식에 반한다고 하지만, 원래 수출관리제도는 각국이 독자적으로 평가해 운용하는 것”이라며 재차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 강화 조치를 철회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번 조치는 ‘수출관리 강화’ 명분으로 △반도체 소재 등 3개 품목에 대한 수출허가 절차 강화 △군사전용 품목의 수출허가 신청이 면제되는 ‘백색 국가’ 지정 철회 등 2단계로 구성됐다. 1단계는 일본 정부가 자국 기업의 수출허가 심사권을 쥐고 이를 수입하는 한국 기업들의 숨통을 조이겠다는 것이다. 통상 90일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서류 미비와 심사 강화를 이유로 결정을 미루거나 아예 허가를 내주지 않을 수 있다. 일본의 한 외교소식통은 “경제산업성의 결정에 따라 명목상 규제강화인 0부터 최악의 경우 금수조치인 100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2단계는 백색 국가 지정 철회다. 한국은 2004년 이후 안보우방국으로 분류돼 군사전용 품목에 대한 수출허가 신청을 면제 받아왔다. 그러나 오는 24일까지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각료회의를 거쳐 백색 국가 제외 여부를 확정, 다음달에 새 제도를 시행한다. 백색 국가에서 제외되면 계약 건마다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하고, 집적회로, 탄소섬유, 공작기계 등으로 규제강화 품목이 대폭 확대될 여지가 많다.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사실상 식료품 등 일부 수출품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상품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일본 입장에서 추가 대항조치 카드를 꺼내지 않고 백색 국가 지정 철회만으로도 엄청난 압박 효과를 거두리라는 기대가 높다.
참의원 선거 이후 집권 자민당이 다수당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사정 변경 없이 강화된 규제를 완화할 이유가 없다. 현재 일본이 요구하고 있는 제3국이 포함된 중재위원회 설치 등에 대한 한국 측의 반응이 없을 경우 규제품목 확대나 비자발급 강화 등 추가조치 카드를 꺼낼 수 있다. 연말이나 내년 초로 예상되는 일본 기업의 압류자산 매각 시점까지 압박 수위를 최대한 끌어올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장기전이 예상되면서 한국에 소재를 수출하거나 한국에서 반도체 등을 수입해 전자제품을 제조하는 일본 기업들은 애간장을 태우며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도쿄(東京)신문은 이날 “일본의 수출규제로 한일 기업들이 공멸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최대 전자제품 제조사인 소니는 한국에서 TV용 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을 공급 받고 있다. 만약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로 한국 기업이 소재를 확보하지 못해 생산이 정체되면 연쇄 타격을 입는다. 소니 측은 아사히(朝日)신문에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어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며 “TV 생산을 못해 상품이 고갈될 가능성을 포함해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에 따르면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를 생산하는 스텔라케미화는 싱가포르 공장을 활용한 수출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포토리지스트(감광액) 제조업체인 도쿄오카(東京應化)공업은 수출허가 신청에 필요한 서류가 많아지는 만큼 미비 서류가 없도록 준비를 강화하고 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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