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사법부가 박근혜 정부와 교감을 통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사건 선고를 늦췄다는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 서울고법의 현직 부장판사가 “당시 대법원이 외교적 해결의 시간을 벌어 준 것”이라며 양 전 대법원장의 사건 지연 처리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강민구(61ㆍ사법연수원 14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전날 자신의 블로그에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과 일본의 통상보복’이란 글을 올리고, “양승태 코트에서 선고를 지연하고 있던 것은 박근혜 정부에서 판결 이외의 외교적ㆍ정책적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벌어 준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이것 때문에 양 전 대법원장이) 지금의 대표적 사법농단 적폐로 몰리면서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강 부장판사는 이어 “감정적 민족주의 주장은 듣기에는 달콤하지만, 현실 국제 외교관계에서는 그런 주장만으로 국익을 지킬 수는 없다”며 “가장 피해야 할 것이 감정적 민족주의 선동이고, 답은 이미 수많은 전문가가 내놓은 바 있다”고 강조했다.
강 부장판사는 강제징용 판결 문제로 한일관계가 악화된 책임을 한국 정부의 탓으로 돌리는 듯한 발언도 내놓았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가 해결하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 우리 정부가 “사법부 판단이기 때문에 행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고 대응한 것을 두고, 강 부장판사는 “(현 정부의) 이런 대응 방식은 대외적 외교관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사법부도 한 나라 국가시스템 속의 하나일 뿐이라고 외교 상대방은 당연히 간주하는 것이고, 그래서 양승태 코트 시절 그 같은 고려를 한 측면도 일정 부분 있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강 부장판사의 주장을 두고, 법조계에서는 양승태 사법부 당시 법관들이 조직 이익을 위해 강제징용 재판을 이용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적절한 발언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 수사 결과 양승태 사법부는 2013년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등과 비서실장 공관에서 가진 1차 소인수회의를 시작으로 비공식적 만남을 통해 박근혜 정부와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 정황이 다수 확인됐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일본 전범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파기환송한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이 재상고심에서 확정되면 한일 관계에 파장이 예상된다고 보고, 이를 최대한 늦추거나 결과를 뒤집으려 한 것으로 전해진다. 양승태 사법부 또한 이에 발맞춰 양 전 대법원장의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도입 등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재판 하나만 보고 버텨 온 고령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처지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란 지적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실제 당시 청와대와 대법원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사건 해결을 방치한 결과,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은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8개월만인 지난해 10월에서야 겨우 확정됐다. 그 사이 수많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선고 결과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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