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강진 가는 길
◇악연의 끝 자리
당시 다산은 10월 20일 밤에 체포되어 27일 옥중에 들어갔다가, 11월 5일에 강진 유배가 결정되었다. 다산은 감옥에서 ‘옥중에서 소동파의 서대시 운에 화답하여(獄中和東坡西臺詩韻 옥중화동파서대시운)’란 시를 썼다. 긴 시라 뒷부분의 한 대목만 읽어 본다.
밤기운 하늘 바람 모든 것이 서글픈데 夜氣天風兩慘悽(야기천풍량참처)
호두각(虎頭閣)엔 무서리에 달빛이 낮게 떴다. 虎頭霜重月華低(호두상중월화저)
옥리가 추구(芻狗)를 우습게 봄 알았지만已知獄吏輕芻狗(이지옥리경추구)
대관(臺官) 흡사 목계(木鷄) 같음 오래도록 웃는도다. 長笑臺官似木鷄(장소대관사목계)
다산이 갇혀 있던 의금부의 추국장은 추녀 끝의 기와가 범의 머리처럼 생겼대서 호두각(虎頭閣)으로 불렸다.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 밤기운은 뼈에 저미고 바람은 매서웠다. 범이 아가리를 쩍 벌린 모양의 기와 너머로 갈고리 모양의 상현달이 낮게 걸렸다. 추구(芻狗)는 제사 때 개 모양으로 풀을 엮어서 만든 물건이다. 제사가 끝나면 내다 버리므로 쓸모를 잃고 버림받은 천한 물건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쓴다. 옥리는 이미 다산이 재기 불능의 상태인 줄을 알아채고 함부로 마구 대했던 듯하다.
시의 주석을 보면 장기에서 의금부로 다시 끌려왔을 때, 다산의 추국을 맡았던 대관(臺官)은 이기경이었다. 이기경은 제 손으로 다산을 처결하겠다며 작정하고 나섰지만, 결정적인 한 방을 도저히 찾지 못했다. 다산은 자신을 신문하던 이기경이 나무로 깎은 닭처럼 뚱한 표정으로 근엄한 체 데면데면 구는 것이 씁쓸해서 숫제 웃음이 나왔다.
결국 1801년 11월 5일, 다산 형제의 유배 명령이 떨어지자, 이틀 뒤인 7일에 이기경은 다시 다산 형제를 엄히 국문해야 한다는 계청(啓請)을 올렸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답이 내려왔다. 이기경은 어떻게든 판세를 뒤엎어보려고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계청을 올렸다. 하지만 북경 황제에게 토사주문을 보낸 일을 계기로 옥사를 서둘러 종결지으려 한 노론 강경파는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확전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기경과 홍낙안은 이번에도 다산을 죽일 수 없게 되자 분이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주마등 같이 스쳐간 기억
‘벽위편’에는 신유옥사 당시 처형당한 사람의 명단과 죄를 적고, 이를 이어 유배형에 처해진 사람의 이름을 나열했다. 그 첫머리에 다산 형제의 이름이 올라있다. 다산의 이름 아래 적힌 인적 사항은 이렇다.
성은 정(丁), 문과에 급제했고 벼슬은 승지다. 목사 정재원의 아들이고, 사적(邪賊) 정약종의 아우다. 이승훈의 처남이고, 황사영의 처숙이며, 윤지충의 고종사촌이다.
정약종과 이승훈,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사형당했고, 윤지충은 10년 전인 1791년 진산 사건 당시에 죽었다. 이 네 사람은 천주교와 관련된 가장 큰 사건의 중심인물들인데, 다산은 이들 모두와 피를 나눈 형제거나 혈족으로 얽힌 지극히 가까운 사이였다. 이 짧은 설명만으로도 이들이 왜 그토록 다산을 죽이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러고도 다산 형제가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기적에 가까웠다.
그뿐이 아니다. 1784년 4월 15일, 두릉에서 서울로 오던 배 위에서 처음 이벽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들었다. 당시 다산은 23세였다. 이듬해인 1785년 3월 중순에 명례방에서 천주교 집회를 갖던 중 추조에 적발되었을 때 다산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이벽은 다산과는 사돈간이었고, 첫 영세 신자였던 이승훈은 친누이의 남편이었다. 1787년 정미반회 사건은 다산이 직접 당사자였다. 이즈음 다산은 가성직제도 하의 10인의 신부 중 한 사람으로 4,5년간 열심히 활동했다. 1789년 북경에 보낸 이승훈의 편지를 쓴 것도 실제로는 다산이었다고 이승훈은 주장했다.
1791년 진산 사건의 당사자인 윤지충은 다산과는 사촌간이었고, 그의 입교 또한 다산 형제의 인도에 따른 것이었다. 1795년에는 배교를 표방한 상태에서도 검거 위기에 처한 주문모 신부의 구출을 극적으로 도왔다. 1801년 책롱 사건을 일으킨 정약종은 그의 친형이었다. 한 술 더 떠 백서로 조선을 발칵 뒤집었던 황사영은 다산의 조카 사위였다. 정약종의 책롱 속에서는 다산이 황사영에게 보냈던 편지까지 나왔다. 모든 천주교 관련 주요 사건에 다산은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모두 지근거리에서 연루되었다. 이들이 모두 참혹한 죽음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만은 거짓말처럼 살아남았다.
정조의 우악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 또한 진작에 신앙을 위해 몸을 내던져 죽었을 몸이었다. 하지만 배교로 끝이 났다. 돌이켜 보면 득의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 꿈은 컸지만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조의 비원이 담겼고, 자신의 열정이 새겨진 화성 신도시 계획은 임금이 세상을 뜨자마자 그대로 폐기되었다. 화려하게 지어진 새 건물과 그 장한 성곽들은 단청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잡초에 덮이고 말았다. 꾸다 만 꿈에서 깬 것만 같았다. 다산은 다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 차라리 속이 후련했다.
◇놀란 기러기
11월 9일 무렵 다산 형제는 유배지로 출발했다. 길이 하담 쪽과는 방향이 달라 다시 부친의 묘소를 들르지는 못했다. 이날 밤 두 사람은 동작나루를 건넜다. ‘밤에 동작 나루를 지나며(夜過銅雀渡)’란 시를 통해 당시의 정황이 드러난다. 남대문을 나서 청파역을 지날 때쯤 해서는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달빛도 희미해서 길이 자꾸 지워졌다. 배를 타기 위해 백사장을 지나는데 말발굽이 모래에 묻히면서 서걱대는 소리를 냈다. 삭풍이 휘몰아쳐 마음이 더욱 황황했다. 배를 탔지만 상앗대가 얼어붙고, 사공은 추운 날씨에 손이 곱아 노를 젓기 어려울 정도였다. 강을 건너다가 도성 쪽을 돌아보니 남산의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살아서 이 강을 다시 건너올 수 있을까. 형제는 말없이 남산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놀란 기러기(驚雁)’는 다음 날 과천에 와서 간밤의 풍경을 떠올리며 지은 시다.
동작 나루 서편으로 갈고리 같은 달에銅雀津西月似鉤(동작진서월사구)
한 쌍 놀란 기러기가 모래톱을 건너간다. 一雙驚雁度沙洲(일쌍경안도사주)
오늘 밤 갈대숲 눈 속에서 함께 자곤今宵共宿蘆中雪(금소공숙로중설)
내일이면 머리 돌려 제가끔 날아가리. 明日分飛各轉頭(명일분비각전두)
깊은 어둠 속 강물 위로 꽁꽁 언 배 한 척이 찌그덕찌그덕 소리를 내며 강을 건넌다. 하늘에는 갈고리 같은 상현달이 어슴푸레 떠 있다. 어둠 속에서 놀란 기러기 한 쌍이 끼룩끼룩 울며 모래톱을 건넌다. 모래톱을 건너 갈대숲에 내려앉겠지. 포근한 눈밭에 앉아 곤한 잠을 청한 뒤, 날이 밝으면 다시 각자 머리를 돌려 제 갈 길을 찾아 떠날 것이다. 다산은 캄캄한 어둠을 뚫고 날아가던 한 쌍의 기러기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다.
◇말은 오열이 되고
금강을 건너, 11월 21일에 나주 북쪽의 율정(栗亭)에 당도해 묵었다. 내일 아침이면 형제는 작별해야 했다. 여기서 길이 갈렸다. 다산은 그 막막한 심정을 ‘율정의 이별(栗亭別)’이란 작품에 담았다.
띠집 주막 새벽 등불 가물가물 사위는데茅店曉燈靑欲滅(모점효등청욕멸)
일어 앉아 샛별 보곤 장차 이별 참담하다. 起視明星慘將別(기시명성참장별)
맥맥히 입 다물어 둘이 다 말이 없고脉脉嘿嘿兩無言(맥맥묵묵량무언)
굳이 목청 가다듬다 오열이 되고 만다. 强欲轉喉成嗚咽(강욕전후성오인)
흑산도 아득하다 바다 하늘 닿았건만黑山超超海連空(흑산초초해련공)
그대는 어이하여 이 속으로 드시는고.君胡爲乎入此中(군호위호입차중)
고래는 이빨이 마치 산과 같아서鯨鯢齒如山(경예치여산)
배조차 삼켰다가 다시금 도로 뱉네.呑舟還復噀(탄주환복손)
지네는 크기가 쥐엄나무 꼬투리 같고蜈蚣之大如皁莢(오공지대여조협)
독사는 등나무 넝쿨마냥 얽혔다지. 蝮蛇之紏如藤蔓(복사지두여등만)
예전 내가 장기읍에 있을 적 생각하니憶我在鬐邑(억아재기읍)
밤낮으로 강진 쪽만 바라다 보았었네. 日夜望康津(일야망강진)
생각 날개 펼치다가 청해에서 뚝 끊기면思張六翮截靑海(사장륙핵절청해)
그 물의 가운데서 이 사람을 떠올렸지. 于水中央見伊人(우수중앙견이인)
이제 나 높이 옮겨 교목으로 옮겨가도今我高遷就喬木(금아고천취교목)
진주를 빼버린 채 빈 상자만 산 격일세, 如脫明珠買空櫝(여탈명주매공독)
또 마치 멍청한 못난 아이가又如癡獃兒(우여치애아)
망령되이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과 같네.妄欲捉虹蜺(망욕착홍예)
서쪽 언덕 바로 곁 가까운 데서西陂一弓地(서피일궁지)
아침에 무지개를 분명히 보았지만,分明見朝隮(분명견조제)
아이가 쫓아가면 무지개는 더 멀어져 兒來逐虹虹益遠(아래축홍홍익원)
또 서쪽 언덕에서 다시 서편 옮겨 가네. 又在西陂西復西(우재서피서복서)
담담했는데 헤어지는 새벽이 오자 두 사람은 말을 못 잇고 목부터 멘다. 자기가 갔어야 할 곳인데 어째 형님이 그처럼 아득하고 험한 곳으로 귀양을 가시는가? 자신의 새 귀양지인 강진은 궁벽한 장기에 견주면 도회지나 같았다. 장기 시절에는 생각이 늘 강진 쪽을 떠돌았다. 그 앞바다인 신지도에 형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이제 형님이 있던 곳에 왔지만, 형님은 아득히 먼 서쪽으로 더 멀어졌다. 형님이 안 계신 강진은 진주는 한 알도 들지 않은 빈 상자나 한 가지다. 무지개를 쫓는 아이처럼, 가까이 갈수록 더 멀어지는 무지개의 심술 앞에 망연자실 맥을 놓고 만 시다.
죄는 다산이 더 미웠는데, 조정은 어째서 정약전을 그 험한 흑산도로 내몰고, 다산은 그래도 비교적 번화한 강진으로 보냈던가? 당시 강진 현감은 공서파의 인물로 진작부터 천주학을 몰아내야 한다고 잇달아 상소를 올렸던 이안묵(李安默, 1756~1804)이었다. 그는 넉 달 전인 1801년 7월 22일 강진현감으로 부임해와서 범의 아가리를 딱 벌린 채 다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산을 굳이 강진으로 보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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