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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기고]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평화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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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기고]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평화는 온다

입력
2019.07.02 04:40
수정
2019.07.02 11:16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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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30일 오후 판문점 군사분계선 북측 지역에서 인사한 뒤 남측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30일 오후 판문점 군사분계선 북측 지역에서 인사한 뒤 남측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6월 30일, 청와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나온 문재인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상봉하기로 했다고 발표할 때 나는 한국전쟁과 관련한 책들을 들춰보고 있었다.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소설을 구상 중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미국의 입장에서 쓴 책도, 중국의 입장에서 쓴 책도 있었다. 이윽고 다시 뉴스 화면을 봤더니 66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현직 대통령이 북한 땅을 밟는다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한국전쟁이 멈춘 지 벌써 66년째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 강대국을 비롯해 수많은 나라가 참전한 그 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휴전 상태를 외국인들은 좀체 이해하거나 실감하지 못한다. 2년 전, 한창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가 계속될 때, 한 프랑스 기자에게 “왜 남한 정부는 북한의 위협에도 대화만 고집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비판적인 질문이었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외부의 위협 앞에서는 군사 행동도 불사하며 주권을 지키는 게 맞으니까.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 시도를 멈출 수 없는 이유를 그 날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에 몸소 확인시켰다. 

그는 초소에 서서 북한 땅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25마일 떨어진 곳에 서울이 있습니다. 서울의 주민들은 산 속에 배치한 무기들의 사정거리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하는 25마일은 용산에서 헬리콥터로 이동했을 때 느껴질 만한 심리적 거리다. 한반도의 전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바꿔놓을지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외국인들은 25마일이라는 이 거리를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66년째 중지된 전쟁을 치르느라 서로 국력을 낭비하고 있는 두 동족 국가의 고난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버지니아주 콴티코 미 해병대 국립박물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방문해 기념사하고 있다. 콴티코=고영권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버지니아주 콴티코 미 해병대 국립박물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방문해 기념사하고 있다. 콴티코=고영권 기자

내가 장진호 전투에 관심을 가진 건 시인 백석(1912~1996) 때문이다. 그가 발표한 첫 작품은 ‘산(山)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로 시작하는 ‘정주성’이다. 1935년에 발표했다. 그리고 1962년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나는 시를 쓰고 얼마 뒤 그는 절필했다. ‘세기의 죄악의 마귀인 미제,/ 간악과 잔인의 상징인 일제/ 박정희 군사 파쑈 불한당들을/ 그 거센 물결로 천 리 밖, 만 리 밖에 차던지리라.’ 불과 27년만에 일어난 이 엄청난 시적 변화 앞에서 어쩔 줄 모르던 나는 장진의 노루에 대해 쓴 시를 발견했다. 장에 끌려나온 서른닷 냥 값의 노루를 보고 백석은 이렇게 노래했다. ‘산골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재에 쓴다는 흥정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한다’. 

아름다운 산골 장진을 장진호 전투로만 기억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마찬가지로 노루의 눈물마저도 놓치지 않던 시인의 마지막 작품이 증오의 구절로만 남는다면. 멀리서 국제 정세를 논하는 외국인들에게는 비핵화 선언이 없는 한, 판문점에서 북미 정상이 만나는 일이 쇼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 쇼 이전의 세계가 어땠는지는 우리만 알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 집에 한 명꼴이었다. 살아남았다고 해도 크든 작든 백석과 같은 삶의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처럼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해 온 세월이 어느덧 66년을 넘어가고 있으니 이제는 평화를 준비할 때가 아닐까? 

틈틈이 생중계를 지켜보니 문재인 대통령은 기회만 있으면 감사하다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그 공을 돌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많이 배웠다. 문 대통령께는 내가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말처럼 평화를 향한 발걸음은 돌아가기도 하고, 멈춰서기도 하고, 때로 뒷걸음질치기도 할 것이다. 지난 66년의 경험으로 우리는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진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앞으로도 온갖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한 봄은 온다. 지금이 아니라면 다음 66년 안에는 반드시. 식민지와 전쟁과 휴전으로 고통받은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은 평화를 포기하지 않는 이 마음이리라.

김연수 소설가. 마음산책 제공
김연수 소설가. 마음산책 제공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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