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신인 때부터 자식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소설가 김영하가 몇 년 전 신작을 냈을 때 한 말이다. 당시 김씨의 삶과 작업방식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자주 비교됐고(딩크족, 해외 장기 체류, 외서 번역), 그의 소설은 하루키와 비슷한 ‘나이 들지 않는 문학’으로 호명되곤 했다. 비결을 묻는 질문에 김씨는 “삶의 조건이 (또래와) 다르기 때문”이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선배 작가 한 분이 작가는 모든 걸 경험해봐야 한다, 애를 낳고 키우는 것도 경험해 봐야 작가가 커진다고 충고해 주셨다. 그래서 제가 ‘그럼 애를 안 낳고 늙어가는 사람의 얘기는 누가 쓰나요’ 반문했다.” (본보 2013년 8월 23일자 “거침없이, 호르몬이 시키는대로 내가 쓰고 싶은 것 쓰니 팔리더라”) ‘살인 해봐야 사람 죽이는 얘기 쓸 수 있냐’로 요약되는 작가의 상상력을 감안하더라도(그때 낸 책 제목이 하필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체험의 영향은 무시 못 한다는 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경험과 체험은 다르다. 둘 다 ‘겪어봄’을 뜻하지만 경험이 대상(對象)과 얼마간의 거리를 예상한 접촉인데 반해 체험은 대상과 직접적이고 전체적인 접촉을 뜻한다. 쉽게 말해 경험은 직간접적 ‘겪음’을 모두 뜻하고, 체험은 직접 겪은 것만 뜻한다. ‘체험 수기’란 말은 있어도 ‘경험 수기’란 말이 없는 것처럼.
특정 사안의 당사자로서의 정체성, 당사자성 여부가 그 사안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때가 많은 이유다. 체험은 경험처럼 ‘겪음’이 타인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문화계 미투 운동 이후 출간을 미루는 남성 작가는 봤지만(신작이 여성혐오 논란을 일으킬까 봐 걱정하지만, 무슨 문구가 여성혐오인지 모른다), 그런 여성 작가는 없었다.
본보 창간기획 ‘스타트업! 젊은 정치’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비롯된다. 평균 연령 55.5세, 평균 재산 41억원, 남성 83%의 ‘역대 최고령’ 국회(2016년 개원 기준)로 대의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는 우려다. 물론 국민을 위해 분투하는 정치인은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당사자가 나서야 청년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도 단순한 발상일 수 있다. 그럼에도 청년세대의 삶이 민의로 전달되는 길이 막힌 현실은 수치로 드러난다. 20대 국회에 접수된 의안 2만820건(5월 28일 기준) 중 청년 정책 관련 안건은 65건(0.31%), 실제 가결된 건 3건에 불과하다.
체험이 안 되면 간접 경험이라도 해서 마음이라도 이 시대 청춘이 돼보려 해야 할 텐데, 그럴 의지도 없어 보인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아들의 KT 특혜채용 의혹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같은 당 김성태 의원 딸의 부정채용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남부지검에서다. ‘아비가 스펙’이라는 세간의 비난만큼이나 상징적인 건 고관대작의 자식이 학점 3.29, 토익 925점을 받고 원서 낸 회사 15군데 중 10군데를 서류전형에서 떨어졌고, 그나마 합격한 신입 공채 시험은 청탁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한국은 청년이 취업하기 어려운 나라가 됐다. 이 시국에 “큰 기업에서는 특성화된 역량을 본다”며 청년들에게 ‘노오력’을 주문한 걸 보면 이들은 자식 말도 평소 귀담아 듣지 않는 듯하다.
29세인 19대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됐다 국회 입성에 실패한 안상현 안씨막걸리 대표는 작금의 정당 정치를 이렇게 말했다. “50대가 넘었어도 (젊은 인재를 키우기보다) ‘아 내가 젊은 정치를 해야지’ 하는 거다. 시대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 업데이트 되지 않는 분들이 너무 많다.” 이제는 평균연령 환갑을 바라보는 의원들이 비슷한 나이와 학력과 지위를 가진 이들을 준거집단으로 삼는 한 시대정신을 업데이트 못하는 정치는 반복될 터다. 폐해는 국민의 몫이고, 그들 안에 아비가 스펙인 청년노동자도 있다.
이윤주 지역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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