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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외환위기와 정태수

입력
2019.06.30 18:00
수정
2019.06.30 18:3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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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7년 외환위기가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때문에 터졌다거나, 그로부터 촉발됐다는 식의 언론보도가 눈에 거슬린다. 정 전 회장의 4남인 정한근 전 부회장이 최근 국내로 압송되자 그의 과거에 다시 한 번 관심이 쏠리면서 ‘외환위기의 주범’, 또는 ‘위기 촉발자’로 규정되는 양상이다.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나라가 통째로 거덜난 그 엄청난 사건에서 정태수라는 개인의 책임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건 다른 원인이나 책임이 가려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 정 회장이 참극의 서막을 장식한 건 맞다. 그 해 1월23일 한보철강 부도는 이후 삼미(3월) 진로(4월) 대농(5월) 기아차(7월) 등의 연쇄부도로 이어지는 시발이었다. 유원건설 인수 후 재계 14위로 부상한 뒤, “재계 서열 50위 안에만 들면 정부가 절대로 부도 못 낸다”며 활개치던 그였다. 당진제철소 시설 규모를 당초의 2배로 늘리고 은행 등에서 5조원 넘는 빚을 끌어다 건설자금을 댔다. 1만원짜리 현금으로 채운 골프채와 사과 상자를 돌렸다. 실세 정치인을 동원해 은행장들을 쥐어 짠 결과였다.

□ 하지만 한보로 흘러 들어간 천문학적 대출이 오직 정 회장의 불법과 비리 때문이었다고 보는 건 오산이다. 그 때 국내 금융권엔 돈이 넘쳤다. 임기 내 선진국 진입을 선언하고 싶었던 김영삼 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요건 충족을 위해 외환자유화 조치를 서두르면서 싼 이자의 해외자금이 물밀 듯 몰려왔다. 농촌에 볼링장만 하나 차려도 시설자금이 대출될 정도였다. 돈 값은 싸고,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이 떠오르고 있었다. 기아차를 위시한 다른 모든 기업들도 앞다퉈 은행 돈 끌어다 막대한 시설투자에 나섰다.

□ 그러니 무리한 차입경영은 당시 국내 기업들의 전형적 현상이었다. 또 감독시스템도 없이 대폭 자유화된 외환거래는 종금사의 무리한 차입투자로 이어졌고, 한보에 앞서 그쪽에서부터 자금경색이 본격화했으니, 정작 위기는 그쪽에서부터 먼저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외환위기 책임은 정태수라는 한 인물보다 정권의 치적을 위해 정책적 무리수를 뒀던 당시 정권과, 국가부도를 상상조차 못했던 무능한 관료들이 훨씬 더 무겁게 지는 게 맞다. 문제는 지금도 정치권이 우리 경제의 갑작스런 위기 가능성을 거의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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