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친구’와 늦잠, 마사지, 아열대 과일 즐기며 만끽한 라오스 여행기
2년 전, 27년 지기 정숙씨를 잃을 뻔했다. 몸무게가 갑자기 20kg나 빠져서 병원을 방문했더니 편도암이라고 했다. 정숙씨는 직원들에게 일을 맡기고 치료에 들어갔다. 꼬박 1년을 몸을 회복시키는 데 전념했다.
암으로 병상에 누웠는데도 “이상하게 행복하더라”고 했다. 친구는 남편이 IMF로 직장을 그만둔 후 사업(가구유통업)을 시작했다. 그 뒤로 한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태어나 처음 마음껏 쉬는 휴가를 가진 거라고 했다. 사실은 그것 때문에 우리 사이의 우정이 단단해진 거였다. 나도 젊은 시절부터 인테리어업에 뛰어들었다. 피 튀기는 사업의 현장에서 여장부로 살아가면서 생긴 서로의 생채기를 보듬어주면서 27년 우정을 이어왔다.
지난 6월, 라오스로 여행을 떠났다. 친구가 아픈 이후로 여행의 가장 큰 주제는 하나다. ‘쉼’. 사업이 체질로 굳어져서 DGB금융그룹이 만든 라오이싱 사무실과 코트라 무역관을 방문했지만, 그 외에는 ‘툭툭이’를 타고 다니면서 라오스의 바람을 맛보고 쉬는 게 전부였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늦도록 잠을 잤다. 습관 때문에 새벽에 잠이 깼지만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새들이 미열처럼 남은 졸음과 사위어가는 어둠을 쪼아대도록 버려둔 채 여유를 즐겼다. 침대에 누워 즐기는 아침 시간이라니! 일상에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호사였다.
그 선물 같은 시간에 문득 정숙씨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다리를 놓아준 것은 거래하던 은행의 직원이었다. 그는 “김 대표와 나이도 같고 성격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 있다”면서 일하는 곳을 알려줬다. 나는 귀한 인연이라는 직감이 들어 작은 꽃다발을 준비했다. 은행직원은 정숙씨의 남편이었고, 그의 예감대로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됐다.
느지막이 일어나 머리를 감으러 쇼핑센터로 갔다. 우리 돈 1,500원 남짓이면 30분 동안 머리를 감겨주고 두피 마사지까지 해준다. 근처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과일시장으로 직행, 두리안, 망고 같은 제철 과일을 맛봤다.
과일이 한창이어서 뜻밖의 체험을 하나 했다. 두리안 하면 그 특유의 냄새를 떠올리지만 과일시장에서 산 싱싱한 두리안은 특유의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내 머리에 각인된 구릿한 냄새는 냉장고에 몇 시간쯤 넣어둔 후에야 폴폴 풍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두리안의 악취는 철이 지났거나 과육을 밖으로 꺼낸 뒤 방치했을 경우에 발생하는 사태였던 것이다.
싱싱한 두리안으로 배를 채운 후 마시지샵으로 향했다. 현지에서 오래 산 교민의 소개를 받아 간 마사지샵이었다. A급이라고는 못하겠지만, 가격 대비 만족도는 무척 높았다. 가장 마사지를 잘하는 친구와 함께 짝을 맺고 4일 내내 같은 사람에게 마사지를 받았다.
마시지 중에 어쩌다 나이 이야기가 나왔다.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들은 내 나이를 30대 중후반쯤으로 봤다. 내가 나이를 알려줬더니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는 시늉을 했다. 과장된 몸짓이었지만 정말 놀라는 눈치였다. 앞으로도 조명이 어둑한 마시지샵을 애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과 마음을 다 풀어주는 마사지샵이었다.
“우리는 바쁜 게 체질인 모양이다, 그치?”
사나흘쯤 흘렀을 때, 정숙씨가 그렇게 말했다. 맞다. 쌀국수와 찐 밥, 파파야 샐러드도 입에 맞고 마사지도 좋았지만 며칠 지나자 슬슬 일에 대한 욕구가 일었다. 돌아보기도 싫던 일상이 다시 그리워지는 건 여행이 제 몫을 다해줬다는 증거다.
그런데, 막상 내일부터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월요병처럼 마음 한켠에 슬며시 뜨악한 기분이 스몄다. 이럴 땐 내 마음의 언덕, 정숙씨가 필요하다. 남자 천지인 사업판에 뛰어들어 갑질에, 진상에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늘 또 다른 나처럼 곁에서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은 친구가 있어 여러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지친 마음을 맡길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자이자 든든한 전우다.
당신은 사업가로서 행복했나요?
누가 그렇게 묻는다면 한 템포를 쉬어야 대답이 나올 것 같다. 하지만 ‘No’는 아니다. 친구가 있었으니까. 목이 마른 뒤에야 시원한 물맛을 알고 폭염을 겪고 나서야 그늘의 고마움을 안다. 진짜 단맛은 쓴맛을 모르고는 알 수 없다고 했던가. 겪을 때는 밉기만 하던 일상들이 한 번 돌아보니 애증이고, 두 번 돌아보니 그리운 것들로 그득한 이유일 것이다.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정숙씨와의 끈끈한 우정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 귀한 인연을 어디에 견줄 수 있을까.
“저거 봐라. 야시 같다.”
마시지샵에서 나오면서 정숙씨가 하늘을 가리켰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망고 과육처럼 노릿한 노을이었다. 나도 모르게 감탄을 쏟았다. 비행기에 몸을 실을 일만 남겨두고 있다는 걸 아는지, 라오스가 여우처럼 저렇게 예쁜 빛으로 유혹한다.
좋다가도 싫고, 싫다가도 좋아지는 것, 사업이 그랬고, 사람이 그랬다. 잡힐 듯 잡히지 않다가 어느새 손안에 들어와 있던, 슬프고 노엽게 만들다가도 함박웃음을 짓게 하던 세상사. 세상이 부리는 여우 짓에 속아 지금껏 버텨온 건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마음속으로 라오스에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래, 일상에 지치면 다시 다니러 올게. 요 야시 같은 라오스야!’
김복순 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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