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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자동차, 엄마는 유모차… 여전히 성평등에 무딘 광고들

입력
2019.06.29 04:40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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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가사ㆍ육아에 상품 사는 역, 남성은 돈 벌고 상품 파는 역 많아

LG의 공기청정기 광고는 남성을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모습으로, 여성을 유모차를 끌고 육아하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유튜브 캡처
LG의 공기청정기 광고는 남성을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모습으로, 여성을 유모차를 끌고 육아하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유튜브 캡처

# ‘깨끗한 공기를 들고 다닌다’는 한 가족이 있다. 작은 공기청정기는 출퇴근하는 아빠의 차 안에, 수험생 동생의 책상 위에, 아기의 유모차 안에서 온 가족을 지킨다. 광고 속에서 아기의 유모차를 끄는 건 ‘엄마’ 즉 여성이다(LG 퓨리케어 미니 공기청정기 편).

# 식사를 마친 커플이 계산대 앞에 선다. 남자가 먼저 주머니에 손을 넣지만 지갑이 없다. 꽃을 들고 서있던 여자는 짜증이 난 듯 ‘됐어요’ 라며 핸드폰을 꺼내 모바일 결제를 하고 떠난다. 장면이 바뀐 뒤 남자는 떠나간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홀로 울고 있다(삼성 갤럭시 S10 삼성페이 편).

삼성의 ‘갤럭시S10:삼성페이편’ 광고에는 남성이 데이트비용을 내야 하고 여성은 이를 당연시 여긴다는 고정관념이 반영됐다. 광고정보사이트TVCF 캡처
삼성의 ‘갤럭시S10:삼성페이편’ 광고에는 남성이 데이트비용을 내야 하고 여성은 이를 당연시 여긴다는 고정관념이 반영됐다. 광고정보사이트TVCF 캡처

‘웬 20년 전 얘기야’ 싶지만 두 광고는 2019년 올해 상반기 방송과 인터넷, 극장에서 방영됐다. 첫 번째 광고는 은연중 ‘육아는 여자의 몫’이라는 낡은 성 역할 고정관념을 드러낸다. 지난해 조사기관 엠브레인이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아빠들이 육아를 담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데 89.9%가 찬성했지만 광고는 아직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 광고도 마찬가지. “남성이 데이트 비용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정관념을 조장할 뿐 아니라 자신의 소비를 남성에 떠넘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된장녀’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게 이를 모니터링한 서울YWCA의 분석이다.

광고는 트렌드에 민감하다지만 성평등엔 여전히 무디다. 28일 서울 YWCA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대중매체 양성평등 내용 분석 사업’의 일환으로 올해 3월 25일부터 4월 14일까지 방영된 광고 381편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광고 속 성별 고정관념은 여전했다. 광고 속 주요 등장인물 469명(여성 211명, 남성 258명) 중 육아나 가사를 하는 여성은 13명, 남성은 3명에 그쳤다. 반면 돈을 버는 역할은 남성이 15명으로 여성(6명)의 두 배가 넘는다. 상품을 설명하는 주체적 역할(140명)의 63.6%는 남성 차지. 반면 상품을 사고 사용하는 수동적 존재는 과반수가 여성이다.

장난감 요괴메카드 광고에서 게임을 하는 학생과 이를 지도하는 선생님은 남성이다. 여학생은 뒤에서 게임을 구경하거나 응원할 뿐이다. 광고정보사이트TVCF 캡처
장난감 요괴메카드 광고에서 게임을 하는 학생과 이를 지도하는 선생님은 남성이다. 여학생은 뒤에서 게임을 구경하거나 응원할 뿐이다. 광고정보사이트TVCF 캡처

어린이용 광고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장난감 ‘요괴메카드’ 광고에서 팽이 게임에 직접 참여하는 어린이와 게임을 지도하는 선생님은 모두 남자다. 여학생들은 뒤에서 게임을 응원할 뿐이다. 남녀가 같은 역할로 나와도 고정관념은 여전하다. 운동보조제 ‘칼로바이퍼펙트 파워쉐이크’ 광고에서 운동하는 남자 모델은 강인하게 그려지지만, 여자 모델은 신체 특정부위를 클로즈업하며 날씬함이 강조된다.

운동보조제인 칼로바이퍼펙트 파워쉐이크 광고에는 운동하는 남성과 여성이 나오지만 유독 여성의 신체만을 클로즈업 한다. 광고정보사이트TVCF 캡처
운동보조제인 칼로바이퍼펙트 파워쉐이크 광고에는 운동하는 남성과 여성이 나오지만 유독 여성의 신체만을 클로즈업 한다. 광고정보사이트TVCF 캡처

이런 광고들이 왜 반복될까? 광고계에서는 결정권자들의 ‘젠더 감수성’을 문제로 꼽는다. 광고주는 물론, 광고회사 책임자 중 남성이 많다 보니 성평등한 광고를 기획해도 채택되기 쉽지 않다는 것. 프리랜서 카피라이터인 김진아 울프소셜클럽 대표는 “최근에는 제작회의에서도 성차별적 요소가 없는지 논의하는 경우도 많아졌지만, 최종 결과는 결국 광고주의 감수성에 좌우되기 쉽다”고 말했다.

광고 속 성차별에 대한 별다른 제재가 없는 것도 원인이다. 영국 광고표준위원회(ASA)는 지난 14일부터 ‘유해한 성 고정관념을 담은 광고’를 방송과 온라인에서 전면 규제하기로 했다. ASA는 규제 근거로 “성 고정관념이 있는 광고를 본 어린이ㆍ청소년들에게 선택이나 기회를 제한해 불평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들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규제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현행 방송법상 광고는 방송사업자의 자체 사전심의만 거쳐 방영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의 사후심의가 있지만 성평등과 관련해서는 구체적 기준이 없어 심의위원들의 ‘상식’이 심의를 좌우하는 형편이다. 현재 관련규정은 ‘방송광고는 국가, 인종, 성, 연령, 직업, 종교, 신념, 장애, 계층, 지역 등을 이유로 차별하거나 편견을 조장하는 표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방송광고심의에 관한 규정 제13조)뿐. 더구나 지난 2017년까지는 심의위원 9명 전원이 남성이었다. 지난해 출범한 제4기 위원회에야 비로소 여성 셋이 합류했다.

방송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인터넷 광고에 대해서는 차별에 대한 규정이 없어 관련 심의조차 못하는 상황이다. 방심위 관계자는 “인터넷 광고가 불법을 다루거나 그 해악이 노골적이라면 제재를 하고 있지만, 성차별은 엄연히 따져 불법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규제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결국 지금으로선 시민의 힘이 성차별 광고를 근절할 최선의 해결책이다. 황경희 서울YMCA 여성참여팀 간사는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비판하고 불매운동을 벌인다면 제작자들도 성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높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공개됐던 디즈니코리아의 아동복 광고는 남자아이에게 ‘용감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 여자아이에게는 ‘만화주인공처럼 예쁜 여자친구’라고 묘사해 비판을 받았다. 디즈니코리아 SNS 캡처
지난달 공개됐던 디즈니코리아의 아동복 광고는 남자아이에게 ‘용감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 여자아이에게는 ‘만화주인공처럼 예쁜 여자친구’라고 묘사해 비판을 받았다. 디즈니코리아 SNS 캡처

실제 소비자의 비판을 받아 기업이 광고를 내리거나 내용을 바꾼 경우도 있다. 지난달 디즈니코리아가 공개한 아동복 광고는 여자아이를 ‘만화 주인공의 예쁜 여자친구’로만 묘사해 비판을 받았고 기업은 새로운 광고를 제작했다. 2016년 현대차는 광고 속 ‘여자니까 봐준다’ 라는 대사에 비판이 이어지자 광고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 안전을 돌아본 2016년 화장품브랜드 아이소이 광고. 광고정보사이트TVCF 캡처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 안전을 돌아본 2016년 화장품브랜드 아이소이 광고. 광고정보사이트TVCF 캡처

최근에는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펨버타이징(페미니즘+애드버타이징)도 등장하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방영된 화장품브랜드 아이소이의 광고가 대표적이다. 광고는 2000년 화제가 됐던 여성포털 ‘마이클럽’의 ‘선영아 사랑해’ 광고를 재구성해 ‘이 나라는 선영이에게 덜 해로운 곳이 됐나요?’라고 질문을 던져 큰 호응을 얻었다. 최근에도 여성을 진취적인 모습으로 그리는 광고가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때론 메시지와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여성의 자신감을 강조하면서도 모델이 성적 대상화에 가까운 자세를 취한 원더브라 광고가 그 예다.

원더브라의 광고는 ‘자신있는(Confident)’ ‘강인한(Powerful)’과 같은 자막으로 여성의 힘을 강조하지만 광고 속 모델은 손가락을 입에 무는 등 성적 대상화에 가까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광고정보사이트TVCF 캡처
원더브라의 광고는 ‘자신있는(Confident)’ ‘강인한(Powerful)’과 같은 자막으로 여성의 힘을 강조하지만 광고 속 모델은 손가락을 입에 무는 등 성적 대상화에 가까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광고정보사이트TVCF 캡처

국내에서도 광고 속 성차별 문제에 대한 인식이 커진 만큼 사회적 논의를 통해 구체적인 기준을 만들고 광고주들의 자발적 노력을 이끌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심미선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최근 성차별 광고를 금지한 영국의 경우 무엇이 유해한 성 고정관념인지에 대한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예시를 규정에 담아 광고주들에게 명확한 경고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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