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70달러 안팎에 머물렀다. 국민 대부분은 헐벗고 배고픔에 시달렸다. 마땅한 자원도 수출할 기술력도, 폐허로 변해버린 나라에는 없었다. 북한보다도 못 사는,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랬던 한국이 50여년 뒤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만달러를 훌쩍 넘겼다. 이런 유례 없는 발전의 원동력 중 하나로 많은 이들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꼽고 있다.
1961년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에게 비빌 언덕은 미국이었다. 하지만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무상원조를 받는 나라에 차관까지 제공하지는 못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들어 차관을 거부했다. 실제로는 ‘민주 국가인 미국이 쿠데타로 집권한 나라를 지원해선 안 된다’는 이유였다는 게 중론이다. 정부는 유럽으로 눈을 돌려 경제부흥을 이룬 같은 분단국가 서독을 찾아 읍소했다. 천신만고 끝에 서독으로부터 상업차관으로 약 1억5,000만마르크(약 3,000만달러)를 제공받기로 했다. ‘한ㆍ독 경제 및 기술협력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차관을 받고 광부 인력 파견을 약속했다.
1963년 12월 21일 광산근로자 123명이 처음 독일 땅을 밟은 뒤 이후 1977년까지 7,968명의 광부가 파견됐다. 1966~1976년 사이엔 간호사ㆍ간호조무사 1만2,000여명이 서독의 병원과 요양소에 배치됐다. 이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지하 2,000m 갱도에서 목숨을 걸었고, 환자들을 간호하며 이역만리에서 고달픈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낯선 이국에서의 외로움과 이방인으로서의 설움은 서로 의지하면서 떨쳐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해가며 모은 돈은 한국의 가족들에게 보냈다. 이들 파독 근로자들이 10년여에 걸쳐 본국에 송금한 돈은 1억달러를 상회했다. 1964년 11월 30일까지 그 해 우리나라 수출액이 1억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이들이 송금한 외화는 경제 발전의 종잣돈이 됐고, 외화벌이 성공 스토리는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으로 1970년대 중동 개발 현장으로 이어졌다.
파독 근로자들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산업역군이지만, 당시 서독의 입장에서는 외국인노동자였다. 최빈국 출신의 이 ‘외노자’들은 서독인들이 꺼려하는 일을 하거나 부족한 노동력을 대신했다. 마치 지금(2018년 6월 취업비자 발급 기준) 우리나라에 있는 100만명의 외노자처럼 말이다. 일부 업종에서는 외노자 없이는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의존도가 높은 게 현실이다.
이런 애달픈 외노자 성공 모델의 원조격인 우리나라에서 제1야당 대표라는 사람이 외노자 차별 발언을 했다는 것은 씁쓸하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 19일 “외국인은 우리나라에 그간 기여한 것이 없고 세금을 낸 것도 물론 없다. (외국인들에게) 똑같이 임금 수준을 유지해줘야 된다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말해 논란을 자초했다. 국적에 따른 임금 차별을 금지하는 근로기준법이나 대법원 판례, 국제노동기구(ILO)의 규약 등을 굳이 끄집어 내지 않더라도 어처구니 없는 망언이다. 더욱이 황 대표는 청년들에게 “중동이나 중남미로 가서 일자리 찾으라”고 독려하고 “우리나라의 성공스토리를 해외에 전파하겠다”던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장관과 국무총리, 대통령권한대행까지 지낸 인물이라는 점에서 저 발언은 더욱 뜨악하다. 한 해에만 호주 관광취업비자 받는 인원만도 2만명이 넘는 등 미국, 일본, 호주 등 세계 곳곳에서 취업하려는 우리 청년들은 수만명에 달한다. 황 대표에게 묻고 싶다. 우리 청년들에게도 “당신들은 그 나라에 기여한 것도 없고 세금도 안 냈으니 그들이 주는 대로 받으라”고 말할 텐가.
이대혁 경제부 차장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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