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 사회에선 ‘힘의 논리’가 목소리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한국일보> 는 매주 금요일 세계 각국이 보유한 무기를 깊이 있게 살펴 보며 각국이 처한 안보적 위기와 대응책 등 안보 전략을 분석합니다. 한국일보>
지난달 14일 태국 일간 방콕포스트는 이 나라의 방위 정책과 관련해 꽤 주목할 만한 소식을 전했다. 군 소식통을 인용한 “태국군이 미국의 리퍼비시(재정비) ‘M1126 스트라이커’ 장갑차 37대를 8,000만달러(약 925억원)에 구매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보도였다. 이에 더해 미국은 동일한 장갑차 23대를 무상으로 추가 제공할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태국군에 배치될 스트라이커 장갑차는 총 60대가 되는 셈이다. 올해 말부터 미국에서 인도받을 예정이다.
2000년대 이후 미군이 참전한 여러 전장에서 활약한 ‘M1126 스트라이커’는 세계 최상급 성능의 장갑차로 꼽힌다. 8륜 구동으로 최고 속도는 시속 62마일(약 99.8㎞), 최장 주행거리는 312마일(약 502㎞)에 각각 달한다. 핵ㆍ화학ㆍ생물학전(前) 대비 정찰, 대전차 유도미사일 운반, 박격포 수송, 보병대 수송 등에 쓰이는 다목적 전투차량이기도 하다. 미군도 오는 2030년까지 계속해서 실전 운용할 방침인데, 방콕포스트는 “미국이 다른 나라에 스트라이커 장갑차를 판매하는 건 태국이 처음”이라는 소식통의 말을 전했다. 게다가 이번 계약에는 무기와 격납고, 연습장 개발, 예비부품, 유지 보수, 통신 시스템 등과 관련한 항목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두 나라 모두에 ‘좋은 거래’라고 볼 만하다. 미국과 태국의 오랜 동맹 관계를 감안하면, 사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게 별로 없다.
5년간 美무기 도입 중단… 중국산 무기로 대체
그러나 태국 정부의 지난 5년간 행보를 돌이켜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2014년 태국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문민정부를 몰아내고 집권하자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행정부는 태국과의 군사 협력 및 신규 무기거래 중단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무기 공백’을 태국은 중국산 무기 수입 확대로 메웠다. 특히 이번 장갑차 도입 프로젝트의 경우, 당초 유력하게 검토된 건 중국의 VN1 장갑차였다. 하지만 ‘미국통’으로 분류되는 아삐랏 꽁솜뽕 육군참모총장이 예상을 깨고 미국과의 거래를 성사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한마디로 ‘M1126 스트라이커 장갑차 계약’ 건은 군부 정권 출범 이후 중국을 주요 무기 공급망으로 삼았던 태국 정부의 노선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징후였다는 얘기다.
태국은 한국ㆍ일본ㆍ필리핀ㆍ호주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안보동맹을 맺고 있는 5개국 중 하나다. 그런 만큼 1982년부터 두 나라는 합동군사훈련인 ‘코브라 골드’를 매년 실시하는 등 군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한국 국방기술품질원에 따르면, 2008~2014년 미국의 대(對)태국 무기 수출액도 총 162억달러(약 18조7,353억원)로, 스웨덴(400억달러ㆍ약 46조2,600억원) 우크라이나(233억달러ㆍ약 26조9,465억원)에 이어 세계에서 3위였다. 같은 기간 태국에 대한 중국의 무기 수출액은 66억달러(7조6,329억원, 세계 5위)에 그쳤다. 태국군 장교들의 미 육군사관학교 파견 교육 등도 활발히 시행돼 왔다.
하지만 2014년 5월 쁘라윳 짠오차 당시 태국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를 주도, 2011년 총선을 통해 선출된 잉락 친나왓 총리를 실각시킨 뒤 스스로 총리직을 꿰차게 되면서 태국과 미국의 관계, 특히 ‘군사 분야’의 협력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동남아시아연구소의 이언 스토레이 선임연구원은 지난 1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기고한 글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태국의 미 군사장비 인수 등을 지원하는 자금 480만달러를 삭감하고, 미ㆍ태국 공동 군사훈련도 취소하거나 축소했다”고 전했다. 미국은 태국 군부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봤다는 말이다. 특히 쿠데타로 출범한 정권에 대한 무기 판매, 군사훈련 제공 등을 제한하는 미국 법률에 따라 오바마 행정부가 군 장비 거래, 인적 교류 등을 대폭 줄여 버린 건 태국에 상당한 타격이 됐다.
中서 탱크ㆍ잠수함 대량 구매, 인적 교류도 활발
태국은 대신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는 달리, 태국은 중국과 영토 또는 해상 경계 분쟁을 겪고 있지 않다. 중국도 태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미ㆍ태국 동맹의 결속력을 약하게 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을 법하다. 대화는 술술 풀렸고, 태국은 중국산 무기를 잇따라 도입하고 있다. 스토레이 연구원은 “태국에선 워싱턴의 손해가 종종 베이징의 이익이 되곤 하는데, 태국 군부는 그 최신 사례”라며 “2014년 쿠데타 이후 태국과 중국의 관계는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고 표현했다.
SCMP에 따르면 2016년 5월 태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제3세대 주력 탱크인 ‘VT4’ 28대를 도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2017~2018년에도 같은 기종 20대를 추가 주문했다. 총 2억8,000만달러(약 3,236억원) 규모의 거래로, VT4 탱크가 배치된 중국 이외의 국가는 태국이 처음이다. ‘MBT-3000’으로도 불리는 VT4는 중국이 자체 설계를 통해 개발한 전투용 탱크로, 1,300마력 디젤엔진을 탑재하고 125㎜ 포가 장착돼 있다. 최대 시속은 75㎞, 최대 주행거리는 500㎞다.
이뿐이 아니다. 태국은 2017년 5월 자국 방위산업 사상 최대의 거래를 중국과 맺었다. 중국의 디젤-전기 잠수함 S26T 3척을 10억3,000만달러(약 1조1,907억원)에 사들이기로 한 것이다. 전투시스템과 승무원 훈련 지원 등이 포함된 건 물론, 2척 가격에 3척을 공급하는 ‘파격적 혜택’까지 제공됐다. 중국은 또, 지난해 7월 태국 북동부 콘캔주(州)에 군용 무기ㆍ장비 생산시설도 세웠다.
게다가 중국과 태국의 ‘군사적 유대’는 하드웨어를 넘어섰다. 태국군 장교와 사관후보생들이 중국 군사교육기관의 강좌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양국은 합동 군사훈련도 역내에서 가장 자주 실시하고 있다. 태국군 특수부대는 중국 측과 함께 훈련을 하는 최초의 외국군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태국 국내에서 ‘중국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게 아니냐’라면서 투명성에 의문을 던지는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2016~2017년 중국의 대태국 무기 수출액은 무려 206억달러에 이른다.
다시 미국으로 유턴?... “방콕의 생존전략”
물론 현시점에서 미국과 태국의 군사 협력이 ‘올스톱’ 상태인 건 아니다.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을 계기로 3년 만에 무기 거래가 재개됐다. 같은 해 6월 태국은 미국의 블랙호크(UH-60) 헬리콥터 4대를 사들였고, 넉 달 후엔 워싱턴에서 쁘라윳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도 하는 등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다. 지난 3월 총선을 통해 쁘라윳 총리가 재집권에 성공한 만큼, 양국 관계를 불편케 했던 걸림돌도 사라졌다. 피터 헤이먼드 주태국 미국 대리 대사는 지난 3월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미 행정부는 태국을 인도ㆍ태평양 전략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으며, 무기 판매와 군사합동훈련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태국의 미국산 스트라이커 장갑차 구매는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태국의 이 같은 무기 거래는 미중 양강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그들 특유의 ‘균형 외교’인 동시에,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패권 경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미국의 안보전문매체 내셔널인터레스트는 “태국의 사례엔 무기 획득과 관련해 실용적 측면과 국내외 정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이 반영돼 있다”며 “방콕의 ‘생존 전략’은 동남아 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미국의 역할 축소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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