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 속 동물의 자리
서래마을 공원에 버려진 토끼들… 재개발 지역엔 길고양이 떠돌아
급속한 도시화로 갈 곳 없어져… 인간이 가축화, 돌볼 책임 있어
중세의 세계관을 담고 있는 개념인 ‘존재의 거대한 사슬’(the Great Chain of Being, scala naturae)에서 동물의 자리는 천사와 귀족 그리고 평민 아래에 있다. 그 중에서도 가축은 야수보다 더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신과 가까울수록 고귀함과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사람과 다르게 동물은 “인간이 사용하도록 놓여 있을” 뿐이다. 하지만 관념의 세계를 떠나서 보자면, 사실 동물은 인간 사회 어디에나 존재했다.
◇인간에게 가까운 자리: 방 안에 들어올 권리
이집트에서 고양이가 사랑 받는 동물이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럽에서도 애완동물에게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정도이다. 그런데 이집트 가정의 고양이들은 이름도 있었다.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나 식탁 밑에서 생선 한 마리를 먹고 있는 고양이. 이 광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이집트에서도 낯설지 않았다. 이집트의 부유한 가정에서 고양이의 자리는 안락한 식탁 밑이었다.
고양이가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된 사연을 우리의 옛이야기는 이렇게 전한다. 어느 마을의 어부가 우연히 잡은 잉어를 놓아주었는데, 이 잉어가 용왕의 아들이라 보답으로 보배 구슬을 선사했다. 부자가 된 어부네를 시기하던 이웃 마을 악한 노파가 구슬을 훔쳐 가자, 이 집의 개와 고양이가 강을 건너 이를 되찾아오게 된다. 구슬을 입에 문 고양이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너던 중, 개가 다그치는 바람에 고양이는 구슬을 강에 빠뜨리고 만다. 개는 집으로 가버렸지만 고양이는 미안한 마음이 커서 강가에 남아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그러다 하루는 잡은 물고기 배에서 구슬을 찾게 되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주인의 환대를 받으며 따뜻한 안방에 자리를 잡게 되고, 말을 시켜 구슬을 잃게 한 개는 마당 구석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모든 개와 고양이가 이렇게 자리를 잡은 건 아닌 듯하다. 병아리를 물고 도망하는 고양이와 급하게 고양이를 쫓으러 버선발로 마당으로 뛰어나오는 주인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에서 고양이는 집 밖 어딘가에 자리 잡은 들고양이(野猫)일 따름이다. 그런가 하면 개는 일하고 쉬는 사람들 곁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함께 하고 있다. 인간에게 익숙한 개와 고양이의 자리는 그렇게 사람들의 곁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 사회에서 다른 동물들이 누리지 못한 ‘반려’라는 유대 관계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자리: 수집된 동물들
특정한 자연 환경에서 살고 있는 코끼리나 사자, 악어 같은 동물을 가까이 둘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다. 이들을 포획하고 운반하고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런 특별한 동물을 가두어 두기 위해 ‘인간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들었다. 야수를 구경거리로 삼는 것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의 즐거움이었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건축물로 꼽히는 로마의 콜로세움은 이런 즐거움의 공간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로마의 콜로세움 지하는 미로와 같은 작은 공간들로 나뉘어 있었다.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듯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잡혀온 신기한 동물은 이곳에 갇혔다. 신기한 짐승들은 쇼를 위해서 사납게 굴어야 하기 때문에 굶주리고 목말랐고 성이 나도록 일부러 고통 속에 방치되었다. 반면 지상의 극장에서는 살육이 벌어졌다. 때로는 하루에 수천 마리의 동물이 콜로세움에서 죽어갔다. 로마가 기울어가기 전까지 이 곳에서는 백만 마리의 동물이 살육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은 객석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안전했다.
서구 제국의 팽창과 더불어 귀족과 학자들은 전에는 본적이 없는 신기한 동물들을 모아오기 시작했다. 그림과 조각을 수집하듯, 이들은 생물을 모았다. ‘경이로운 방’(Wunderkammer 또는 cabinet of curiosities)이라고 불린 이 공간에는 박제된 동물과 동물의 뼈가 전시되었다. 안락한 이들의 저택에서 밀림의 맹수와 무서운 파충류의 사체는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물론 죽은 동물뿐 아니라 살아있는 동물도 수집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엔 개인 정원에 마련한 사육장에 가둬 두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대중의 볼거리로 공개되면서 규모가 커진다. 근대 초기의 동물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곳의 동물들은 사슬과 철창 안에 있었다. 1800년대 초반 런던의 한 소규모 사립 동물원(Menagerie)을 방문했던 바이런은 이 곳에서 동물들을 보는 게 고통스럽다는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동물들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 유랑단의 마차에 실려 다니며 서커스에 투입되기도 했다. 이런 동물을 수급하기 위해 일군의 동물이 몰살당하는 것은 예사였다. 훈련시킬 새끼 코끼리를 잡기 위해서 우선 어미를 쏘아 죽였다. 죽은 어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새끼를 잡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인기를 누렸던 아기 코끼리 점보는 현실에서는 이렇게 포획된 동물 중 하나였다.
이후 동물원은 동물에 대한 연구와 교육, 그리고 동물 보전이라는 새로운 가치와 역할을 담게 된다. 동물원은 단순히 동물을 가두어 두는 곳이 아니라 이들의 습성을 고려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의 동물들은 이 자리가 불편하다. 작년 가을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퓨마가 열린 문을 통해 탈출했다. ‘뽀롱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야생동물은 탈출 네 시간 만에 동물원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사살되었다. 2010년 서울대공원에서 태어나서 3년 후에 대전동물원으로 옮겨진 이 동물에게 평생 허락된 자리는 20 평 남짓의 방사장이었다. 이 곳을 벗어난 동물은 뽀롱이라는 큰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을 해할 수 있는 맹수가 된다.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인간과 동물 사이의 울타리는 이들이 있을 자리와 있어서는 안 될 공간을 명확히 분리했다. 인간에게 가까운 자리는 이들에게 전혀 특권이 아니었다.
◇경계 위의 동물들: 토끼와 길고양이의 자리
서초동 서래마을의 몽마르뜨 공원에는 토끼들이 살고 있다. 누가 처음 가져다 놓았는지 모를 애완 토끼들이 이곳에서 번식했다. 그리고 토끼들이 살고 있는 걸 본 다른 이들의 토끼 유기가 이어져 지금은 꽤 많은 수의 토끼가 있다. 이들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결정하기는 어렵다. 공원의 명물로 보아야 할지, 공원 파괴범으로 보아야 할지, 공원의 상주하는 도시 생태 동물로 보아야 할지, 유기동물로 보아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러는 사이 녀석들은 자리를 옮겨 이제 법원 잔디밭에도 진출했다.
도시의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지역은 차나 사람이 적고 숨어 지낼 곳이 많아 길고양이들이 지내기에 나쁘지 않다. 그래서 대규모의 철거와 건축물 시공이 시작되면 수를 불린 고양이 무리들의 거취가 문제로 떠오른다. 일부는 공사시설에 갇히기도 하고, 일부는 돌보는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워져 방치된다. 지금 우리가 길고양이라고 부르는 인간 사회의 고양이들은 야생종이 아니다. 모두 가축화된 종이다.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기 이전 길고양이는 인간과 느슨한 유대를 유지하는 동물이었다. 비올 땐 툇마루나 광에서 비를 피하고 추울 땐 부엌의 부뚜막을 찾았다. 여기서 새끼를 낳고 먹을 것을 찾았다. 누군가의 소유도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나 주거의 형태와 생활의 패턴이 달라지면서 이들과 인간의 느슨한 유대는 단절되었다. 최근 이런 길고양이들을 돌보는 캣맘들은 새롭고 적극적인 방식의 유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고양이를 ‘커뮤니티 동물’로 분류하기도 한다. 도시 공동체에서 인간이 돌볼 책임이 있는 동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이 가져온 환경의 변화는 사회 안에서 동물의 자리를 바꾸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바꾼다. 특히 짧은 시간 안에 생겨나는 변화는 인간보다는 동물에게 치명적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 동물을 위한 자리는 우리가 이들과 어떤 유대관계를 맺는지, 이 관계에 어떤 가치를 두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어디에나 있는 동물을 새로운 유대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곳에도 동물이 없는 끔찍한 세상을 만들지도 모른다.
천명선 서울대 수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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